지금은 대한민국의 건실한 중추가 ‘386세대’란 것은, 기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대학가 및 한국사회에 커다란 ‘이념적 자유’ 의지를 던져준 시대조류와 연관이 있다. 당시 수많은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이념서적을 쏟아냈다. 때로는 조악한 번역에, 넘치는 열정으로 각종 이데올로기 책들을 찍어낸 것이다. 그리고,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탄압에 꺾이지 않고, 캠퍼스는 때늦은 이념공부에 열중이었다.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과 억압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호기심’이 한꺼번에 분출된 셈이다. 아나키스트, 공산주의, 해방신학 등이 그 당시 대학서클의 스터디 주제였다. 물론, 최종스타, 아니, 최종관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일 것이다.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가. 그러나, 정서적으로, 사회변혁의 청년에게는 등불 같은 주제였다. 무려 150년 전, 독일에서, 영국에서, 마르크스가 엥겔스를 만나 인류의 영원한 과제에 대한 해답을 던져주었다니.
물론, 어느새 소련은 무너지고, 중국마저 끼어든 자본주의는 더욱 활개를 치고, 빈부격차는 더 심각해졌다. 때맞춰 마르크스가 한국을 찾는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에 맞춰 그의 청년시절을 다룬 영화 <청년 마르크스>(원제: The Young Karl Marx)가 개봉된다.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다. 문제는 요즘 세대는 마르크스가 공자처럼,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사상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가. 그 생일을 챙겨주고, 기념영화라도 만들어졌다는 것이.
영화 <청년 마르크스>는 라울 펙 감독이 작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던 다큐멘터리이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아이티공화국 출신의 라울 팩 감독은 이 작품 전에도 대단한 영화를 찍었었다. 1960년대 미국 흑인민권운동을 다룬 다큐 <아엠 낫 유어 니그로>(I Am Not Your Negro)를 연출했다. 마틴 루서 킹, 맬컴 엑스, 메드가 에버스 등 걸출한 흑인지도자 틈바구니 속에서 흑인의 삶과 고뇌를 작품에 남겼던 ‘흑인’작가 제임스 볼드윈의 담담한 이야기를 담았던 흑백 다큐였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는 1840년대 유럽의 숲속에서 시작된다. 일단의 넝마주이 무리들이 숲에서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줍고 있다. 아마도 사유지에서 땔감을 줍는 모양이다. 하지만 말을 탄 자들이 나타나 이들을 제지, 제압한다. 그들은 잔인하게 이들을 제압하고, 서슴없이 죽이기까지 한다. 당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실을 보여준 셈이다. 영화는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가 살아있는 생명체인지, 그게 사유물인지를 말하다가 생각할 틈도 없이 혼란의 유럽으로 넘어간다. 이후 영화는 우리가 아는 카르 마르크스의 젊은 시절을 보여준다. 1844년, 독일을 떠나 프랑스 망명길에 오르고, 또 다시 벨기에 브뤼셀로 떠나야했던 그의 처절한 혁명의 길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 우리는 마르크스 사상이 완성되어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헤겔, 포이에르바하, 프루동 등 ‘굉장한 이름’을 만나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절친이자 혁명의 동지 엥겔스도 만난다.
30년 전, 거칠게 번역된 마르크스의 저작물을 읽던 세대가 이제는 마치 ‘모차르트 전기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되살아난 캐릭터를 본다니 감흥이 새롭다. 물론, 386세대들은 더 이상 사회과학서적을 탐독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지금은 주식을 하고, 비트코인을 쳐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마르크스가 “지금, 유럽을 떠돌던 유령이 있다”라고 말했던 ‘공산주의’는 어떻게 되었나. 물론, 지금 다시 마르크스를 꺼내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공산혁명의 조종(弔鐘)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종말 이후를 생각하는 하나의 지침서이다. 더 나은 삶을 몽상하는 자들을 위한 오래된 책인지 모른다.
라울 펙 감독의 전작 <아엠 낫 유어 니그로>는 올해 초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영진위 박스오피스 집계에 따르면 1,745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몇 명이나 극장에서 볼까. 물론, 그 수치가 마르크스주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5월 17일 개봉/ 15세관람가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