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는 여왕 빅토리아 1세가 왕관을 쓰고 있던 1832년에서 1901년을 일컫는다. 산업혁명으로 세계 최강의 나라로 세계를 주름잡을 때였다. 여자는? 빅토리아시대는 ‘성 역할’이라는 고정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복잡한 에티켓’과 ‘철저한 룰’이 사회문화의 틀을 형성했다. 여성에게는 희생정신과 순결을 요구했다. 패션을 보면 풍성한 철제프레임의 크리놀린과 코르셋으로 한껏 죈 잘록한 허리가 여성의 복종을 상징했던 시기였다. 보수적 이데올로기는 피아노의자 다리에까지 양말(커버)을 신기는 폐쇄적 선비(?)사회를 지향했다. 딱 그 시절,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이 만들어졌다. 그것도 한국 창작뮤지컬이다. <레드북>(연출:오경택)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우수신작으로 선정된 <레드북>은 지난 해 초, 대학로에서 딱 2주간의 시범공연을 가졌다. 하지만 시범공연만으로도 ‘보석같이 반짝이는 무언가’를 뮤지컬 팬에게 보여주었다. 그 <레드북>이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다시 팬을 찾고 있다. ‘하필’ 공연예술계에 ‘미투 열풍’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말이다.
19세기 영국, 안나는 글재주가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여자에겐 전혀 쓸모가 없는 재주였다. 어느 날 변호사 브라운이 찾아와서는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당신에게 유산을 조금 남겼어요. 당신이 할머니를 간병하고 모실 때 큰 기쁨을 주셨다는데...”란다. 안나가 한 것이라곤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 ‘이야기를 지어내’ 휠체어에 앉아 재미없는 노년을 하릴없이 보내는 바이올렛 할머니에게 들려준 것뿐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란 것이 “옛날 옛날~” 동화가 아니라, ‘여자들의 솔직한 상열지사‘였던 것이다. 안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하는“ 여자였던 것이다. 19세기에 영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니 안나의 상상력은 또 얼마나 야할까.
안나의 발칙한 재주-야한 상상력-는 곧 지하창작 집단인 ‘로렐라이 언덕’으로 이끈다. 여성들도 자신들의 생각을 글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여성 동지들로 구성된 ‘로렐라인 언덕’에 합류한 안나는 리더의 응원에 힘입어 ‘타고난 글빨’을 세상에 마구 퍼뜨리기 시작한다. 물론, 발칙한 <레드북>은 영국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결국에는 신성모독과 음란물유포죄로 법정에 서게 된다.
뮤지컬 <레드북>은 흥미로운 시대를 배경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친다. 한정석 작가의 실속 있는 상상력은 이선영 작곡가의 흥겨운 음악과 합쳐져 완벽한 뮤지컬로 완성시킨다.
<레드북>은 남성우위의 사회에서 진취적인, 발칙한 상상력의 여성이 겪어야했던, 그리고, 헤쳐 나가는 과정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무대 위의 이야기는 21세기 한국에서도 공감을 안겨준다. 특히 ‘미투 시대’에서 더욱 빛을 발한 장면은 당시 ‘문학계의 판관’이라고 할 문학평론가라는 존재이다. 이름조차 음흉한 ‘딕 존슨’은 ‘문단에서의 권위’를 앞세워 안나에게 추파를 던지고, 비평을 미끼로 성적 추행을 자행한다. ‘문단의 보잘 것 없는 약자’ 안나가 딕 존슨에게 강력한 한방을 먹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레드북>은 통쾌한 작품이다.
아이비가 연기하는 안나는 ‘킹키 부츠’의 로렌만큼 유쾌하고, 활기차고, 사랑스럽다. 자신의 인생을 용감하게 개척한다는 점에서도 통한다. 기이한 문학동호회 ‘로렐라이 언덕’의 리더인 로렐라이를 연기한 지현준의 연기는 무대를 압도한다. 때로는 박력 있는 남성(목소리)으로, 때로는 한없는 유연한 여성스러움으로, 그리고 대부분은 중성적 연기로 무대 위 공기를 쥐락펴락한다. 나쁜 놈 딕 존슨을 연기한 원종환과 야한 상상력에 불을 당기는 도로시/바이올렛의 김국희 연기도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이다.
지난 2월 6일부터 공연을 시작한 <레드북>은 3월 3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출연: 아이비, 유리아, 박은석, 이상이, 지현준, 홍우진, 원종환, 김국희 등 (KBS미디어 박재환)
"신사의 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