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개봉된 윤제균 감독의 영화 <영웅>이 3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잘 알려졌듯이 이 영화는 뮤지컬 <영웅>을 스크린 버전으로 만든 것이다. ‘영웅’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재무상(재정대신)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아죽인 안중근 의사의 삶과 철학을 담고 있다. 뮤지컬 <명성황후>로 국내 창작뮤지컬에 묵직한 역사의 무게감을 더했던 에이콤의 윤호진 대표(예술감독)가 안중근 의거 100주년에 맞춰 2009년, 처음 무대에 올렸던 작품이다. 초연 이후 뮤지컬 <영웅>은 소소한 수정/보강 작업을 거치며 거의 매년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지난 12월, 서울 강서구 마곡에 새로 문을 연 LG아트센트 서울에서 아홉 번째 시즌을 알렸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웅장하고도, 화려한 LG아트센터에서 만나보는 민족영웅 안중근의 마지막 1년의 심정은 어떨까. 영화 개봉과 함께 오리지널 뮤지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이번 공연은 오랜 기간 무대에서 검증되며 갈고 닦은 작품답게 익숙한 부분은 더욱 세련되게, 어색한 부분은 좀 더 세밀하게, 그리고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서사극으로 다듬어지며 완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첫 장면은 자작나무 숲에서의 단지동맹이다. 안중근과 그의 독립투사 동지들은 비장하게 손가락 한 마디씩을 자르며 피로써 ‘대한독립’을 절규한다. 관객들은 공연 초입에서부터 곧바로 거칠고 장엄한 독립투쟁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 땅에서 ‘왕웨이’ 만두가게에서의 배고픈 청춘들의 코믹한 만두송을 들으며 ‘영웅’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뮤지컬 [영웅]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안중근의 투쟁을 담는다. 그러니 작품은 묵직하고 직선적이다. 안중근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후반부에는 동양의 평화를 묵직하게 제창한다. ‘영웅’을 거듭 볼수록, 안중근을 자세히 알수록 재판정에서 펼쳐진 ‘이토 히로부미의 열다섯 가지 죄목’만큼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안 의사의 지론인 ‘동양평화론’이다. 그것은 안중근이 독립투사 영웅이냐, 아니면 (일본 시각에서의) 테러리스트냐는 명분을 뛰어넘는, 아시아적/세계적 거대담론을 전해준다.
그런데 뮤지컬 [영웅]은 거듭 볼 때마다 흥미를 끄는 지점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존재감이다. 안중근의 명분과 거사는 분명하다. 그것을 역사적으로, 도덕적으로 뒷받침하는 안티고니스트로 이토 히로부미가 존재한다. 아마도 작품을 보고나면 안중근의 가계(家系)와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볼 것이다. 똑같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펴보면 그의 정치역정이 만만찮게 화려하고, 드라마틱했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이 나이 스물아홉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그때 이토 히로부미는 68살이었다. 이미 제국주의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통감 등 요직을 두루두루 지낸 원로 중의 원로였다.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향한 것이나, 이토가 그곳을 찾은 것은 각자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꿈’으로 표현하는 것은 몽상가들의 몫이다. 두 인물의 충돌을 다룰 때 ‘동양평화론’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현재로선 아시아적 이상보다는 민족적 의거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말이다.
안중근의 숭고한 의지와 불타는 열정을 느낄수록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접근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음모와 야욕의 이토 히로부미를 그리면서 변태와 악마의 그림자를 숨기지 않는다. 그가 하얼빈으로 향하며 갖는 술자리에서 “뤼순을 둘러보며 부지 좀 알아보게. 생체실험을 할 땅이 필요해..”라는 대사가 있다.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악행을 ‘1909년의 이토 히로부미’에게 덧씌우는 방식이다. 이는 이 시절, 절대악 일본을 다룰 때 우리가 흔히 행하는 클리쉐이다. 그런데 안중근의 거룩한 희생정신과 동양평화의 위대한 담론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글로벌 무대에서의 K콘텐츠의 품격을 위해서는 그런 부분마저 ‘드라마적인 창작’보다는 ‘역사적인 증좌’를 보강해야할 것 같다. 똑같이 이토 히로부미가 뇌물로 받은 고려청자를 들고, 마치 콜라병 만지듯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누가 죄인인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시점에서는 ‘장부의 꿈’을 세계로 더 널리, ‘동양평화론’을 더 크게 선창하기 위한 창작자의 의무일 것이다. 이번이 아홉 번째 무대(시즌)인 뮤지컬 <영웅>은 계속 전진해야할 공연계의 과업인 셈이다.
지난 12월 21일 시작된 <영웅>은 2월 2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의 LG SIGNATURE(엘지 시그니처)홀에서 공연된다.
뮤지컬 영웅 ▷연출:윤금정 ▷음악감독:김문정 ▷가사/대본:한아름 ▷작곡:오상준 ▷편곡: 피터 케이시 ▷출연: 정성화-양준모-민우혁(안중근), 김도형-서영주-최민철(이토 히로부미), 정재은-린지(설희), 윤석원-김늘봄(우덕순), 최종선-김재현(조도선), 김도현-임규형(유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