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는 특별한 독립영화가 방송된다. 연송하 감독의 <역할들>이란 작품이다. 여섯 명의 배우들이 모두 주연급으로 작품을 꽉 채우는 작품이다. 저예산독립영화의 한계를 신박한 설정으로, 고달픈 연기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진정성 있게 펼친다.
우리나라 공연계, 특히 뮤지컬에서는 한 배역을 여러 명의 배우들이 연기한다. 브로드웨이와는 조금 다른 한국식 공연문화인 셈이다. 더블/트리플을 넘어 쿼터플 캐스팅까지 볼 수 있다. 상업적 이유때문이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전엔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맡는 정신없는 작품도 많았다. <역할들>에서는 배우 한 사람이 네댓 개의 역할을 맡는다. ‘뛰어난 연기력’이라기 보다는 ‘저예산 독립영화’답다는 생각이 우선 들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배우들의 연기를 관찰해 보시길. 극중 주요 배역은 배우들의 이름을 따른다. 그들은 연송하(감독이기도 하다), 윤종구, 김범석, 김원정, 윤정일, 박재철이다. 각자의 사연이 있다.
연송하는 연기에 대한 열정은 넘치지만 무대에서 항상 대사를 버벅대는 악몽을 꾼다. 공연을 준비 중인 배우 김범석은 곧 세상에 태어날 아기에게 꺾이지 않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다. 윤종구는 연기를 계속하고 싶지만 섭외가 들어오지 않아 막일꾼, 택배, 이사 알바를 하며 버티고 있다. 김원정은 극단 음향스태프로 일하고 있지만 배우들의 이런저런 짜증스런 요구를 고스란히 받아야한다. 윤정일은 이삿짐 사장을 맡아 종구와 엮이고, 박재철은 복싱관장으로 범석과 만나고, 다단계 아저씨로 나와 김밥 파는 송하를 짜증나게 한다. 이런 식으로 배우들은 각자의 배역과 함께 네댓 개의 단역을 소화해낸다.
결국 영화 [역할들]은 공연을 준비 중인 한 무명 극단의 단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무대’밖 삶을 하나씩 쫓아간다. 먹고 살기 위해, 꿈을 위해, 그리고 과거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아등바등 거리는 인물들을 연기한다. 물론, 큰 줄기는 연극과 복싱이다. 연극은 그들 삶의 열정이지만 개성 강한, 사연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무언가를 완성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다. 주로 음향을 맡고 있는 막내스탭 원정이 그 스트레스를 받아야한다. ‘사각의 링’ 복싱도 인생의 축소판이다. 흥미로운 명대사는 복싱 신에서 나온다. “현실을 알 수 없지만 복싱은 정해진 룰이 있어. 3분 동안 죽도록 싸우다가도 3분 되면 땡하잖아.” 그리고 복싱 장에서는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것없다>의 옥상씬에 버금가는 명 장면이 나온다. 세 명이 슬로우비디오로 춤추는 장면과 범석이 좌절한 뒤 이어지는 스톱 신이다. 아마도 연송하 감독이 이 두 장면을 위해 이 영화를 찍었다고 해도 믿을 듯하다.
준비부터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공연(연극)의 과정을 다루고, 고달프지만 꺾이지 않는 연기에 대한 열정을 담은, 그러면서 인생의 무게감을 전해주는 작품이다. 독립영화임에도 OST가 고급스럽다. ‘그것만이 내 세상’, ‘돌고 돌고 돌고’, ‘행진’, ‘제발’과 함께 마지막 엔딩송으로 이상곤(노을)의 ‘여기’가 흘러나온다. 영화에 묵직한 한 방을 더한다.
배우들의 역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윤종구(종구/영준/복싱선배/단속반1), 김범석(범석/슬기/동창2/김밥손님1/단속반2/에이전시실장), 김원정(원정/인희/복싱고등학생/송하엄마/김밤손님2/대학선배2), 연송하(송하/남희/종구부인/복싱장단운2/대학후배), 윤정일(정일/이삿짐사장/환경미화원/복싱장단원1/극단단원1), 박재철(복싱관장/다단계아저씨/동창1/극단단원2/대학선배1/알바후배)
KBS 1TV <독립영화관>은 금요일에서 토요일 넘어가는 밤 12시 10분에 방송된다. 놓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