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례 감독은 데뷔작부터 각광받았던 충무로 '여성' 영화감독이다. 이제 '여성'이라는 태그를 붙이는 것조차 차별로 보는 세상이 되었지만 임순례 감독은 그런 영화판에서 자신의 영화세상을 꾸준히 확장시켜왔다. 단편 <우중산책>(1994)으로 시작으로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제보자>, <리틀 포레스트> 등을 내놓으며 알게모르게 세상과 투쟁하고, 사람들과 소통해 왔다. 그런 임순례 감독의 신작은 <교섭>이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게 인질로 붙잡힌 한국인 23명의 생환을 위해 사투를 펼쳤던 국가기관- 아마도, 외교부와 국정원- 사람들의 필사의 투쟁을 담고 있다. 아주 짧은 순간, 그보다 3년 전 이라크에서 발생한 또 다른 참극도 등장한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과 <리틀 포레스트>를 감독하던 그 감독이 탈레반과 국정원을? 기대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기존의 임순례 스타일과는 다른 영화이다.
▶임순례 감독: “처음 제작사의 제안을 받고 고민을 했었다. 지금 이 영화가 나온다면 누구나 아는 그 교회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게 되면 본질에 대한 토론은 사라지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다루고 싶은 이야기가 빛이 바라지 않기를 바란다.”
Q. 메가폰을 잡은 계기가 있다면.
▶임순례 감독: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의 방향이 확실했다. 인질 사건의 경위 등 논쟁을 유발할 수 있는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게 아니라, 그들을 구하기 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무장 세력과 교섭하려는 국가공무원, 그것도 외교부와 국정원이라는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다. 서로의 다름을 이겨내고, 의기투합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로 가락이 잡히면서 작품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폭이 더 넓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색적인 소재지만 이런 주제로 무겁고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Q. 당시 그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임순례 감독: “사실 그 당시의 이야기, 여러 가지 상황을 100퍼센트 담을 수는 없었다. 귀국 과정에서 이른바 ‘선글라스 맨’이 노출되기도 했다. 국정원과 당연히 외교부의 교섭담당관이 현지에 갔을 것이다. 그들의 일하는 방식, 취하는 태도가 달랐다. 서로 다른 스탠스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가 이야기를 펼친다.”
Q. 시사회에서 처음 공개되면서 관객반응 중 의외였던 장면은 현빈의 옛날 모습이다. 아마도 (아프간 인질사태 이전에 발생한) 이라크의 김선일씨 사건인 모양이다. 현빈은 자신의 눈앞에서 한국인이 참수당하는 것을 보고는 ‘중동에서 활동하는 요원’으로서 남다른 소명감을 갖게 되는 순간일 텐데, 대부분의 관객들은 단지 ‘미소년 현빈’으로 받아들인 것 같더라. 감독의 의도가 빗나간 것 아닌가?
▶임순례 감독: “영화에서 현빈은 한국에서 돌아갈 데가 없다고 말한다. 왜 귀국하지 않고 낯선 나라를 계속 떠돌까. 박대식(현빈)은 ‘하늘과 땅 사이에 나 밖에 없는 느낌이 좋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이전에 해결해야하는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 앞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인물로 설정된 것이다. 감독들은 영화를 찍으며 대부분 관객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런데, 현빈의 과거모습에서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예상 못했다. 국정원 초임 시절의 모습이다. 지금의 모습과 대비되는 양복도 입고 깔끔하게 나갔다가 눈앞에서 끔찍한 모습을 당하는 신참의 모습을 생각했었다.”
Q. 그럼, 감독님은 아프간 인질 사건 처음 접했을 때를 기억하는가.
▶임순례 감독: “대부분의 국민들과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가지 말라는데 가서 왜 저렇게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까. 국정정서가 그랬고, 저도 그랬던 것 같다. 10년이 지나 제가 그 영화를 만들 줄 꿈에도 몰랐다. 인질보다는 교섭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막막했을 것 같다. 실제로도 우왕좌왕 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탈레반이 알려진 조직이 아니니 막상 누구랑 교섭해야하는지 조차 몰랐다. 강기영이 파슈토어를 하지만 당시에는 다른 언어를 하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Q. 최근 비극적인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 이 영화를 보면서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의 의무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임순례 감독: “영화를 찍으면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가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문제 등으로 논쟁이 흐려져서 영화 자체가 전하고자 하는 미덕이나 본질이 가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지점에서 고민이 많았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촬영하고 완성할 때는 생각 못했는데, 최근 이런 일이 벌어지고 나니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기본적인 국가의 책무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타지에서, 그들의 잘잘못을 떠나, 생명이 풍전등화에 놓였을 경우, 외면하지 않고 일단 안전을 확보해야할 것이다. 처벌은 그 다음 문제이고. 요즘에는 그런 게 좀 더 와 닿는다. 관객분들도 같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Q. 이 영화를 준비하며 관계당국, 즉 국정원고 외교부에 협조를 구했나?
▶임순례 감독: “그러진 않았다. 사실 당시 사건에 대한 구체적 정보 등을 대외비로 봉인되어있다. 외교부도 당시 비난을 많이 받았다. 돈을 주며 협상을 한 것이니. 국정원도 마찬가지이고. 알아서 우리끼리 잘 찍었다.”(팩트체크는?) “그건 불가능했다. 실제 교섭한 사람들과 영화에 등장하는 정재호와는 다르니까. 그렇다고 선글래스맨을 수소문해서 인터뷰할 수도 없었다. 둘 다 영화적으로 창조된 인물이다.”
Q.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들어가기 어려운 나라이다. 그래서 영화는 요르단에서 촬영했다. 요르단 영상위원회와 일해 보니 어땠는지?
▶임순례 감독: “요르단 영상위원회는 파워가 있는 조직이다. 촬영허가, 진행, 인센티브 지급 등은 다 영상위원회를 통해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요르단은 군주제 국가이고, 국왕의 동생이 영상위원장이이다. ‘스타트랙’이나 ‘마션’ 등 많은 할리우드대작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요르단이 인기가 있는 이유가 있다. 요르단은 영국식민지였기에 영어가 잘 통하고, 중동에서도 치안이나 전쟁 위험이 없는 비교적 안정된 나라이다. <인디아나 존스> 찍었던 페트라는 정말 멋졌다.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나라여서 할리우드도 잘 찾는 곳이다.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교섭> 찍을 때 도움을 많이 받았다. 협조를 잘 해주었다.”
Q. 임순례 감독은 한국 ‘여성’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100억 넘는 대작을 찍었다.
▶임순례 감독: “영화 찍을 때는 가늠이 좀 안됐었다. 스케일이 있는 영화니까 돈이 좀 많이 드네 생각했었다. 최근 제작비 인플레이션도 많았고, 외국에서 찍는 것이라 기본적으로 많이 들고, 코비드 때문에 조금 더 들어간 것도 있다. 체감이 안 되다가 개봉일이 다가오니, 손익분기점 맞추려면 구체적인 수치가 나오니 부담감이 온다. 어쨌든 이 영화가 잘되면 후배 여성감독들에게도 기회가 갈 것이다. 블록버스터나 상업 장르영화 저보다 잘 잘 찍는 후배가 널리고 널렸다. 그런 친구에게도 좋은 영향을 줬으면 좋겠다. 우선은 제 발등의 불부터. 일단 BP를 넘어야한다.” (‘아바타’ 이후 예매율 1위이다)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
Q. 대작을 찍으면서 감독님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임순례 감독: “글쎄, 봉준호 감독 같이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예산과 자기만의 스타일을 적절하게 잘 유지할 수 있을 텐데 저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저는 예산이 적을수록 컬러가 강해지는 것 같다. 예산이 많아지면 색깔이 옅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가의 시나리오로 작품을 고를 때 제 색깔을 일관성있게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교섭> 자막에서 제 이름 뺀다면 (누가 연출했는지) 모를 것이다. (잠깐 숨을 돌린 뒤) ‘아닙니다. 알 수 있어요!’ 일반적인 상업 장르 영화였다면 사람들이 훨씬 많이 죽었을 것이다. 현빈과 탈레반이 한 판 붙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건 저랑은 안 어울린다.”
Q. 촬영 과정에서 그런 문제로 의견이 맞선 적은 없었나.
▶임순례 감독: “만약 그랬다면 처음부터 내가 선택을 안했을 것이다. 시나리오 자체가 확실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피디 분이 원하는 방향과 제가 양보할 수 있는 방향이 확실했다. 선택할 수 있는 테두리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가 있었고, 신뢰를 했기에 무리하게 요구한 것은 없다.”
Q. <리틀 포레스트> 다음 작품이 <교섭>이란 것이 조금 놀랍기도 하다.
▶임순례 감독: “2017년에 나온 작품이다. 그때 왜 그런 영화를 찍었냐하면 영화계가 ‘아수라’나 ‘마녀’ 같은 영화였다.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피바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100억 원대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피가 난무하니. 조금 사람들에게 평화로움을 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반작용 같은 것으로 <리틀 포레스트> 만들었다. 그래서 <교섭> 보고나서 같은 감독 맞나 그러실 수 있다. 또 다르면 어떤가. 어쨌든 제가 전형적인 장르영화의 문법이나 화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과장하거나 자극적인 것을 수용하는 폭이 넓지는 않다. 가급적 그 안에서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Q. 그럼 이 영화는 기존의 작품세계를 확장시킨 것인가.
▶임순례 감독: “감독에게 다음 작품의 기회는 영화 개봉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성공한다면 다음엔 더 다양한 것을 시도할 문이 넓어지는 것일 테고 실패하면 그 문이 다시 닫히는 것이다. 저도 다양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블록버스터 장르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큰 영화를 해보는 것도 감독으로서 큰 경험이다. 제작비가 크더라도 내 색깔을 묻힐 수 있다면 또 해보고 싶다.”
Q. 황정민과 현빈 캐스팅이라면, 감독님으로선 최선의 캐스팅 아닌가.
▶임순례 감독: “다른 배우가 정재호를 연기했다면 다른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기대한 것 이상으로 역할을 해주었다. 황 배우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통해 영화에 입문하게 해주어 고맙다고 하는데 저는 그가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이 영화에 동참해주어 너무 고맙다.“
Q. 강기영의 외국어 연기에 대해.
▶임순례 감독: “배우가 외국어 연기를 할 때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황정민의 영어발음이 썩 좋은 것은 아니잖은가. 고위 외교관이 저렇게 밖에 못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관객들은 크게 거슬려 하지 않는다. 영어대사도 중요하겠지만 그와 맞물러 표정과 연기가 뒷받침해 주었기에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강기영 씨의 파슈토어 연기도 그렇다. 언어는 현장에서 원어민이 살펴보았고, 연기적인 부분은 제가 체크했다. 카심은 백 퍼센트 창작인물이다. 두 사람이 무겁고, 진중한 인물이라 카심을 통해 관객에게 숨 쉴 구멍을 만들어주려고 기획한 캐릭터이다. 제 영화의 원칙은 작품 속 배역을 따로 떼어놓고 보더라도 누구에게 종속되는 서브 역할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배역이더라도 그 존재이유가 분명한 캐릭터를 만들고자 한다. 강기영의 카심은 단순하게 웃기고, 역할에서 빠지는 데 끝나지 않고 충분히 의미 있는 캐릭터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Q. 영화감독의 꿈은 언제, 어떤 식으로 꾸게 되었는지.
▶임순례 감독: “오래 전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학교에서 영화를 찍었었다. 당시 하이틴스타였던 임예진이 주인공이었다. 제 뒷줄 앉았고 저는 바로 그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3일 동안 수업 안하고 영화를 찎었는데 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했다. 임예진만 찍을 때도 그 자리에 있어야했다. 제 어깨가 걸려야하니. 괜히 자리를 잘못 앉았나. 다들 임예진에게 관심이 많았다. 저는 감독이 궁금했다. 당시는 후시녹음인데 배우 한 분이 참 연기를 못하더라. 대사를 정말 못 외우더라. 하도 많이 들어서 저도 외겠더라. 감독은 젊고, 배우는 나이가 많았는데 감독이 화를 내고 야단치더라.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감독의 위치에 대해 생각했었다. 당시 연극영화과는 연기만 연극영화과를 가지 못했었다. 대학 가서 불란서문화원 다니면서 누벨버그에 푹 빠져서 영화를 만들어야지 생각했었다. 대학 졸업하고 영화를 택하게 된 것이다.”
Q. 프랑스문화원 키드라면 시네마떼크의 덕을 본 셈인데, 요즘 어렵다.
▶임순례 감독: “정말 그렇다. 관객들은 입장료 15000원이 비싸다고 난리이다. 상업영화는 보는 맛이라도 있는데 독립영화를 찾는 관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예전엔 만명을 넘기기 힘들다고했었는데 요즘은 3-4천명이라고 말한다. 한국영화가 세계에서 새롭고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독립영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보호를 해 주지 않으면 결국 상업영화도 위축되지 않을까. 공적인 자금이 투자나 배급에 지원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Q. 예전에 독립단편 영화 <우중산책> (1994)나왔을 때 정성일 평론가가 ‘홍상수, 김기덕 감독과 함께 임순례 감독을 주목하라’고 말했다.
▶임순례 감독: “그 때 정성일 평론가가 이야기한 것은 작품성 면에서 더 좋은 감독이 되기를 바란다는 덕담이었다. 저는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다. 앞으로 더 성장하고 나아갈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저는 애매한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감독이라는 평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주의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다. 애매하게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쪽 방향으로 꼭 가야겠다는 욕심도 없는 것 같다.”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KARA)의 대표이기도 임순례 감독은 작년 KBS의 드라마 촬영 도중 발생한 사건과 관련하여 “그 사건이 영상제작자들에게 경각심을 준 것 같다. 동물을 대하는 방식이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소품으로 인식하는 것은 지금의 시민의식하고는 안 맞다. 생명에 대한 배려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임순례 감독은 사막이 등장하는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 로렌스>를 꼽았다. 황정민, 현빈, 강기영이 나오는 영화 <교섭>은 18일 개봉했다.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