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가 개봉되었을 때 평론가들은 당황했다. 이 미니멀함은 무엇이며 감독이 의도하는 바가 뭔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신한 신인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한다는 식으로 애매모호한 평을 남겼다. 영화주간지 <<씨네21>>은 곧바로 “그동안 우리(평론/저널)가 잘못 보았던 영화‘였다면 이 영화에 대한 재평가를 했다. 봉준호가 대단한 감독이 될 것임을 한발 늦게 인정한 것이다. 이후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훌쩍 성정해버렸다. 봉준호 감독이 이번 여름에 <설국열차>를 내놓았다. 그가 7~8년 전 홍대 만화가게에서 한달음에 읽었다는 프랑스만화 <설국열차>를 마침내 영화로 완성한 것이다. 한국영화로는 최고제작비인 4000만 달러(430억원)가 투입되었고, 한국배우들보다 외국배우가 더 많이 등장하는 글로벌 대작으로 완성한 것이다. 지난 주 기자시사회를 통해 공개되자마자 평자들의 열광적인 환호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궈버렸다.
설국열차 속의 생존인류
영화가 시작되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 등장하는 전략폭격기가 연상될 장엄한 종말론적 화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히 더워지는 지구를 식히기 위한 인류는 과학적 선택을 한다. CW7이란 것을 공중에 살포한다. 온난화는 막았지만 지구는 도리어 급속 냉각된다. 빙하기가 다시 와버린 것이다. 지구는 꽁꽁 얼어붙고 모든 생물, 인류는 전멸할 위기에 놓인다. 오직 ‘설국열차’에 탑승한 인류만이 최후의 생존자로 남은 셈이다. 이 ‘설국열차’는 17년간 한 궤도를 쉼 없이 달리고 있다. 이 열차 내에는 노아의 방주에 올라탄 인류처럼 선택받은 최후의 인류들이 탑승하고 있다. 하지만 17년간 달리면서 기차 안은 하나의 계급사회로 고착화된다. 기차의 앞부분은 지도자, 퍼스트 클래스 인종이 자리하고 있고, 꼬리칸 쪽은 꾀죄죄한 모습의 하등계층이 벌집 같은 좁은 공간에서 우글거리며 생존해있다. 꼬리칸의 반항아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이런 기차 속 부조리를 깨부수기 위해 반란을 꿈꾼다. 설국열차의 통치/제어 시스템은 견고하다. 크리스 에반스가 이끄는 하층민들은 총과 무기를 앞세우고 앞쪽 칸과 뒤쪽 칸의 경계를 책임진 무력부대와 생존의 전쟁을 펼친다. 크리스 에반스는 설국열차의 보안시스템을 설계했다는 송강호와 그의 딸 고아성을 앞세워 한 칸씩 앞으로 전진한다. 그들이 수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도착한 설국열차 제일 앞칸에서 목도하게 되는 사실은 충격적이며,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봉준호의 집념, 끈기
영화감독은 다들 똑똑하다. 특히 봉준호 감독은 특히나 영민하다. 지난 주 기자시사회가 끝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봉 감독은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청산유수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나간다. 그는 달변가이며 사색가이며, 행운아이다. 이미 <살인의 추억>을 통해 한국현대사가 숨긴 구조적 모순을 잡아내고, <괴물>에서는 정치적 외피와 함께 환경생태론자의 논쟁을 야기하면서도 영화적 재미를 추구했고, <마더>에서는 원빈이라는 최고의 한류스타를 캐스팅하여 김혜자라는 드라마의 왕관을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전작들을 밑천삼아 글로벌 캐스팅을 이뤄냈고 이런 대작을 완성시켰다. 감독은 원작 <설국열차>의 세계관을 초대형 스크린에서 재현시켰을 뿐 아니라 더 확장된 세계관을 선사한다.
설국열차의 세계관
설국열차의 맨 앞 칸, 생존인류의 지도자는 ‘에드 해리스’이다. 설국열차의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라면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열차 밖은 극한의 환경이며, 열차 안은 제한된 자원에 의지하는 인간들로 빼곡하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탑승자, 즉 ‘모든 인류’의 생존을 책임지는 리더의 역할은 자원의 재분배에 대한 장기적인 통찰이 1순위일 것이다. 바나나가 주렁주렁 끝없이 열리는 무인도에 표류한 욕망덩어리 인류와는 차원이 다른 설정이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군상이 펼치는 드라마는 아슬아슬할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사람, 어디 하나 잘못되면 종말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다. 공기순환장치를 잘못 다루거나 보안 해치라도 열려버린다면 인류는 멸종하게 되리라. 기차 안에서 보냈을 위태로운 17년은 인류가 진화/진보하기엔 버겁다. 우선은 존재자체가 목표였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를 통해 정치적 계급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앞 칸의 ‘윌포드’나 꼬리 칸의 길리엄은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권능은 없다.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그 대가로 현상을 더 악화시키지 않게 하는 미봉책으로 17년을 이어온 통치방식인 것이다. 사회적 계층이란 것도 리더 윌포드의 존재 말고는 꼬리칸의 명확한 피통치 무리만이 존재감을 가진다. 윌포드를 동화 계급적 사회를 유지하는 무력집단과 행정가적 메신저를 제외하면 기축세력인 중간계층이 부재한다. 반란군 리더 커티스가 마주하는 퍼스트 클래스는 아마도 약물과 절망적 현실에 연체동물화 되어버린 존재들만이 있다. (이런 경우 혁명은 의외로 쉬울 것이다!)
열차의 최종목적지가 어디일까. 1년에 한 번씩 같은 지점을 통과하면서 최적의 안착지를 찾고 있는 여정이었을까? 물론 그런 면에 보자면 설국열차의 연료나 재활용방식, 제한된 인류이지만 그들을 17년 간 버티게 한 재생 시스템에 대해서도 뚜렷한 과학적 설명이 없다. 다만 꼬리칸 승객을 위한 식자재에 대한 설명만을 잠깐 보여준다. 그것도 충분하진 않다. 나머지 과학적, 논리적 설명은 뭉퉁 사라진다. ‘설국열차’는 ‘프로페셔널’보다는 ‘의지의 인물’을 앞세운 영화인 셈이다. 거창하게 ‘열차의 보안설계자’라는 송강호도 알고보면 그다지 ‘프로페셔널’한 인물은 아니다.
‘설국열차’가 그리는 창세기적 구조는 급속동결된 캔 속의 존재가 갑자기 밖으로 튀어나온 경우의 이야기이다. 조물주는 실재하지 않더라도 여왕개미에 충성하는 일개미의 운명처럼 고달프다. 일개미의 희생으로 개미들의 생존환경이 유지되듯이. 결국, 인류는 눈처럼 하얀 백지에서, 꽁꽁 얼어붙은 대지에서 소박하게 시작할 모양이다. (박재환. 2013.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