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는 최진영 감독의 <태어나길 잘했어>가 영화팬을 찾는다. 이 영화는 25회(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작년 4월 극장에서 개봉되었던 작품이다. 물론, 코로나 시대 독립영화답게 아주 적은 관객이 들었던 영화이다. 그러나 KBS 독립영화관은 '발굴의 기쁨'이라고 부제를 붙여도 될 만큼 훈훈한 작품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태어나길 잘했어>의 영화포스터에 사용된 광고 문구는 ‘어제를 버티고 오늘을 살아낸 내일의 나에게’이다. 정말 기막히게 잘 쓴 카피 같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당신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중학생 춘희는 갑작스레 사고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집에서 살게 된다. 마치 ‘소공녀’처럼, 춘희는 더부살이의 눈칫밥을 먹으며 살게 된다. 상황도 그러한데 춘희에게는 다한증이 있어 손바닥과 발바닥엔 언제나 땀이 나고, 긴장되면 심해진다. 그렇게 불쌍하고, 서럽게 자란 춘희는 한 푼이라도 돈을 벌어 자신의 힘을 수술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벼락을 맞게 되고는 이상한 일이 생긴다. 그 옛날 서럽던 시절의 춘희가 나타난 것이다. 과거의 춘희와 지금의 춘희가 한 지붕에서 과거의 순간과 마주치고, 현재의 고달픔을 나누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최진영 감독은 꿈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단다. 꿈에서 또 다른 자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 그런데, 그 대상이 남자에서 여자로, 즉 자신을 더 아끼고 사랑해주는 ‘과거의 나’를 만나게 된다는 설정으로 바꿨단다.
영화는 ‘해리 포터’처럼, ‘소공녀’(프랜시스 버넷의 소설!)처럼 행복하게 살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운명의 장난의 희생자가 된다. 물론 슬퍼도 외로워도 울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손바닥의 땀처럼, 춘희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있는 모양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영어제목이 ‘The Slug(민달팽이)’이다. 껍질(패각)이 없는 달팽이이다. 마치 ‘외삼촌댁’ 좁고, 천장이 낮은 다락방에 얹혀사는 춘희처럼. 그리고, 민달팽이의 궤적처럼 지나간 자리엔 축축한 흔적이 남아있다.
<태어나길 잘했어>에서 춘희는 화려하고,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캔디처럼 ‘외풍’을 견뎌내는 춘희를 보여준다. 집 안에서는 춥겠지만, 밖에서는 그런대로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하는 존재도 있다.
영화를 보고나서는 나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다. 춘희의 손바닥엔 화상 자국이 있는데, 벼락 맞은 뒤에 만나는 (어린) 춘희의 손에는 흉터가 없다. 시간상으로 흉터가 생기기 전의 춘희겠지만 왜 (어른이 된) 춘희는 그 때의 춘희를 마주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춘희는 마지막에 외삼촌에게 또박또박 대꾸하고, 자신의 서럽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어린 춘희를 꼭 껴안아준다. 그것은 말을 더듬는, 태평소 부는 남자 주황이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어린 시절의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날 때리던 아버지를 한 번 안아 줄 거라고, 그리고 대들 것이라고.”
영화는 춘희의 힘든 삶이, 고통과 회한에서 비참하게 끝나지 않고, 과거의 자신을 끝까지 부여잡고 살아남는다는 것이 너무나 좋다. 희망적이다거나, 낙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삶은 원래 그렇게 힘들지만 그 힘든 삶의 목적은 춘희는 알고 있으니 말이다.
최진영 감독은 전주 출신이다. 이 영화는 전주에서 찍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도 나오는 한벽굴(한벽터널), 경기전, 풍납문(호남제일성)이 등장한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전주에 가시는 분이라면 한번 찾아가 보시길.
▶감독/각본: 최진영 ▶출연:강진아(춘희) 박혜진(어린 춘희) 홍상표(주황) 황미영(노숙자) 변중희(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