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해진이 연기생활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왕(王)을 연기했다. 배우에겐 대단할 것이 없는 새로운 역할을 하나 더 맡았을 뿐이다. 23일 개봉한 영화 <올빼미>에ㅓ 조선 16대 임금 인조(재위 1623~1649)를 연기했다. 조선 '인조'는 ‘북쪽 오랑캐’에게 굴욕을 당하고, 아들마저 인질로 보내야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장성하여 돌아왔는데 ‘오랑캐’와 결탁하여 자신의 보위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왕이 된 유해진은 불안과 번민의 왕좌를 어떻게 지켜낼까. 개봉을 앞두고 지난 11일 오전, 삼청동에서 진행된 유해진과의 인터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연신 웃음꽃이 피었다. 전날 진행된 기자시사회를 통해 “올빼미 재밌다!”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
Q. 기자시사회 이후 반응은 들어보았는지.
▶유해진: “촬영 끝나고 쫑파티에서 한마디 하게 될 때 뭐라고 해야 하나. 좋게 말해야지. 시사회 끝나면 주변사람들, 관계자들은 보통 괜찮았다는 반응이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하면서 기자들이 영화가 잘 나왔다고 이야기해주니 감사하게 생각한다.”
Q. 이미 블라인드 시사회 반응이 괜찮았다는데.
▶유해진: “블라인드시사회를 한 번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그러더라. ‘텐트 밖은 유럽’ 때문에 해외에 있을 때 안태진 감독이 전화로 알려줬었다. 이태리 치즈 집으로 가고 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더라. 안 감독은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걱정을 많이 하셨다. 시나리오를 원체 재밌게 보았기에 기대를 했다.”
Q. 왕 역할 처음 했는데.
▶유해진: “처음 등장할 때 관객들이 웃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객석에서 실소라도 나오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인조의) 첫 등장이 그렇지 않았다. 그야말로 ‘짠~’하고 나타난다. 관객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평소 이미지가 있는데 어쩌지... 관객들이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에 발이 드리워져 있고, ‘음, 저 뒤에 유해진이구나. 저런 분장을 하고 있네.’ 식으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대중에게 자리 잡은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직전에 <공조>도 했으니. 배우는 연기하는 동안에는 자기 자신이 왕이라고 믿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기하기 힘들다. 연기하는 동안은 내가 왕이 생각했고, 다행히 관객들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Q. 광기 어린 인조의 모습을 어떻게 연기했나.
▶유해진: "광기를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다기보다는 한 편의 연극 무대라는 생각했다. 무대에서 그런 역할을 많이 했었다. 물론 왕은 아니었지만.”
Q. 인조와 소현세자, 그리고 그 앞 단계 삼전도 굴욕까지. 역사적 사실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었나.
▶유해진: “역사는 기본이 되는, 딱 그 정도만 생각했다. 나는 시나리오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적 사실이 있으니, 그 사실만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감독과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 더 좋게 한다거나 더 나쁘게 그리지 말자고.”
Q. <올빼미>의 안태진 감독은 <왕의 남자>에서 조감독이었다. 그 영화 찍을 때 혹시 감독입봉하면 같이 하자는 그런 이야기는 나눈 적이 있는지.
▶유해진: “전혀 없었다. <왕의 남자>가 벌써 18년이 되었다. 이번에 촬영하며 그때 생각이 많이 났었다. <왕의 남자> 궁궐 세트가 부안에 있었다. 이번 <올빼미>도 그 곳에서 찍었다. <왕의 남자> 찍을 때가 여름이었는데 엄청 날이 더웠다. 얼음조끼 입었는데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영화 찍으며 그 기억이 새록새록 나더라. ‘저 문 뒤에서 분장하고, 저기 엎드려서 벌벌 기며 왕 앞으로 갔었지..’라고. 안태진 감독은 그 때랑 변한 게 별로 없다. 그때도 말랐었고, 말하는 것도 똑같다. 좋은 작품을 함께 만든, 좋은 추억이 있는 곳에 다시 가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때 정말 열정적으로 연기했었다. 아, 그때 열심히 준비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냥 날아갔다. 내 차례인 줄 알고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고하셨습니다’하며 그날 촬영을 끝내는 것이다. 그날 회식이 있었는데 (이준익) 감독님 옆에 앉아서 내 허벅지를 마구 두드리면 '왜, 그 장면을 안 찍냐'고 하소연했었다. 그때 얼마나 내가 내 무릎팍을 세게, 많이 때렸는지 퍼렇게 멍이 들었더라. 그 정도 열정으로 영화를 찍었던 장소라 의미가 있다. 안 감독도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이번에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Q. 곤룡포를 입었을 때 느낌은 어땠는지.
▶유해진: “격식을 갖출 때가 있다. 궁중의식을 할 때는 전문가가 와서 의복을 갖춰 입게 도와준다. 옷을 몇 겹이나 입었다. ‘왕이 이렇구나..’라며 대우받는 느낌이 들더라. 정말 옷 때문에 행동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그런데 영화에선 일부러 옷을 다 풀어헤친다. 캐릭터상 집어던지고 그랬다.”
Q. 인조는 외로운 왕이다. 그런 무게감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유해진: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인조라는 인물이 복잡하겠구나라는 생각은 했다. ‘왕’이라는 차이만 있지 나머지 배역의 무게는 똑 같은 것 같다. 코미디라면 코미디의 무게감이 있다. 코미디가 훨씬 어렵다.”
“대중들이 영화를 볼 때 ‘유해진이 왕이라고? 어떻게 하나 보자’하고 영화를 보다가 생각보다 못하면 ‘왕(을 한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같은 반응을 듣지 않았으면 했다. ‘유해진이 왕’이라는 이야기를 걷어내고, 세자와 경수, 인조의 이야기를 계속 한다면 배우로서 기분이 좋을 것이다.”
Q. 후배와의 연기호흡은 어땠나
▶유해진: 준열이는 뭐. 함께한 시간이 많았기에 친근하다.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생각한 만큼 잘했다. 정말 잘 성장한 배우이다. 나무가 굵어지는 느낌이다. 소현세자를 연기한 김성철 배우는 맨얼굴을 봤을 때는 몰랐었다. ‘응.응. 그래,그래.’ 했었다. 저랑 붙는 장면 말고, 다른 배우와 연기하는 장면을 (시사회 때) 처음 봤는데 깜짝 놀랐다. 저렇게 탄탄하게 연기를 하나. 노멀한 대사를 저렇게 잘 살리나 싶었다.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다. 다른 작품에서도 그랬나요?“ (기자가 뮤지컬에서는 조승우 배우가 질투 나는 후배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하자) ”와, 소름 돋네. 죽을 때 연기보고 그랬었다. 이 영화, 잘 흘러가겠구나 싶었다. 김성철 배우, 너무 잘한다.“
Q.시사회 끝나고 간담회때 류준열 연기를 칭찬했을 때 류준열이 눈가가 촉촉해 지더라.
▶유해진: “기사 보고 알았다. 기자가 그렇게 쓴 것이라 생각했었다. 현장에서는 못 봤기 때문이다. 영화 보면서 많이 느꼈다. 장애가 있는 역할 이야기를 끌고 가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Q. 유해진 배우의 길에 대해.
▶유해진: “작품마다 조건과 환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배우는 작품만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작품이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그런 것만 생각한다.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어도 그런 가치가 있는지를 본다. 이전에는 친분으로 하게 된 것도 있다. 관계라는 것이 있으니. 영화계가 좁아터진 데라서. 그런 작품은 가능한 안 하려고 한다. 안하는 이유를 이야기하는 편이다. 그게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에서 흥미를 못 느낀다' 식으로 이야기를 꼭 해주는 편이다.”
Q. <올빼미>는 어떤 의미가 있었나.
▶유해진: “<올빼미>는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릴러다운 면이 있었다. 쫀득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이겠구나.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에 대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Q. 연기하는 데 특히 공을 들인 장면이나, 떠오른 장면이 있다면. 강빈(조윤서)과 마주치는 신이 임팩트가 있는 것 같다.
▶유해진: “전체적으로 그냥 넘어간 신이 없다. 강빈과 격한 신을 보여줄 때 여러 방식으로 찍었었다.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연기해보고. 독한 모습을 보여줄 때 어떤 톤으로 갈지. 대사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다. 인조가 정상적이지 못한 면이 있으니까. 뺨 때리는 장면도 그랬다. 이런저런 의논을 했지만 ‘아니다. (너가) 어떻게 해도 (결국은) 나는 때린다’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인조는 어떻게든 때릴 것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손바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Q. 구안와사 증세로 얼굴표정이 마구 떨리는 장면을 연기한다.
▶유해진: “내가 봐왔던 모습도 있다. 나중에 죽을 때 모습은 특별하다. 이런 이야기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모습이 많이 떠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안 나올 때가 있잖은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Q. 인조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유해진: “어차피 영화니까. 끝은 확실히 좋았다. 그 죽음도. 그렇게 마무리 되는 것이 깔끔하다고 생각한다.”
Q. <공조2>가 흥행에 성공했다. <올빼미>의 흥행에 대한 부담은 없는지.
▶유해진: “흥행부담은 늘 있다. 지금 극장가 상황이 좋지 않다. BP보다 조금만이라도 더 관객이 들었으면 좋겠다. 200만이나 210만 정도.”
Q. <올빼미>의 홍보포인트는?
▶유해진: “홍보팀에서는 그렇게 밀더라. ‘현대적 감각의 스릴러’라고. 정말 쫄깃함이 있다.”
Q. <공조2>가 천만을 기대했는데 700만에 조금 못 미친다. 아쉽지 않은가.
▶유해진: “<공조2>도 블라인드 시사회 반응이 좋았다고 하더라. 코로나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었다. 이 정도 흥행이 어디냐. 많이 봐주셔서 감사하다.” (천만이 아니고, 700만이 아쉽지 않은가?) “조금 아쉽기는 하다. 친척들을 다 동원하면 어떨까 싶지만 친척이 수천 명이 되겠나. 지금 저 스코어가 딱 좋다.”
Q. 왕을 했으니 이제 ‘천민’은 하기 어렵겠다.
▶유해진: “그렇지는 않다. 왕은 그냥 배역이다. ‘천민’ 캐릭터에서도 매력적인 인물이 있을 수 있으니. 왕이라는 특별한 것을 경험해 본 것이다. 한번쯤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진짜 하게 될줄은 몰랐다. 진선규 배우랑 이야기했었다. 내가 ‘왕’을 연기하는 게 너무 좋다고. 자기도 그런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Q. 그런데 역사적으로 인조는 훈남, 잘 생긴 왕이라고 한다. 박해일 배우도 인조를 연기했었고.
▶유해진: “그래요? 다행인 것은 나는 인조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본적이 없다. 역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필요한 것만 보았다. 비교할 것이 없으니. 난 그냥 영화 속 인물로 보고, 그 인물을 연기했다. 아마 레퍼런스를 봤다면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저 연기를 참고 할까 하면서.”
Q. 이제 '인조는 유해진'으로 굳어지겠다. 그리고 왕 역할 제의도 많이 들어오겠다.
▶유해진: “하하, 왕왕 들어오겠죠.” (아제개그다!) “왜 아제개그라고 하나. 그냥 개그라고 해 주세요”
유해진은 즐겁다. 그런데 유해진이 연기하는 인조는 혼란스럽고, 광기에 휩쓸린 인물이다. 아들 소현세자(김성철)와 대립하는 유해진의 연기는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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