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김현석)의 시작은 느와르이다. 으스스한 분위기의 비오는 밤, 재개발 직전의 상가건물에 나타난 수상쩍은 사람과 그 모습을 카메라에 몰래 담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정체불명의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사진을 찍던 사람은 나옥분(나문희) 할머니. 이 일대의 민원왕이자 오지랖대왕이시다. 소상공인의 사소한 불법행위를 일일이 채증하고, 서류를 꾸며 구청에 신고하는 그야말로 ‘깬’ 시민정신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이런 철두철미 고발정신은 다른 사람에게는 엄청난 불편함일 뿐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시장통 사람들에겐. 그리고 구청 민원관련 공무원들은 매번 일거리를 만들어오는 이 할머니가 부담스럽다. 이때 이곳에 새로 9급 공무원(이제훈)이 전근 온다. 왠일인지 이 할머니는 영어회화를 배우기 위해 안달이다. 그런데 그 공무원이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 그날부터 할머니는 9급 공무원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애원한다. 할머니는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영어를 배우려하는지, 공무원들은 왜 그렇게 복지부동하거나 사무적인지라 웃다가 울다가 영화가 이어진다
곧 개봉할 영화 <대장 김창수>는 백범 김구의 청년시절 일화를 다룬다. 영화사와 감독은 처음에는 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어 했지만 제작보고회와 시사회를 거치면서 그런 입막음이 부질없음을 실토했다. 그런데 <아이 캔 스피크>는 정말 뜻밖이었다. 이 영화가 ‘일제강점기 위안부 할머니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을 못했으니 말이다. 사실 그런 사전정보 없이 이 영화를 본다면 전반부의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 <동갑내기과외하기>의 공무원 버전인줄 알 것이다.
기실 이 영화는 CJ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여성가족부가 후원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당선작을 기반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한다. ‘위안부문제’를 이렇게 유쾌하고, 그리고, 대중적으로 완성시켰다는 점이 <아이 캔 스피크>의 최대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위안부문제를 다룬 작품-영화와 다큐멘터리-이 심심찮게 만들어지고 소개되고 있다. 일본이 사과를 않고 뭉그적거릴 때, 우리만이라도 그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새겨야할 것이다.
최근 작품의 경향은 과거(할머니가 겪었던) 고통을 현재 젊은이의 방황과 고난으로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아마, 일본 못지않게 과거에 대한 망각, 탈역사적 반응을 보이는 세태에 대한 고육책일지도 모른다. <아이 캔 스피크>는 불행하게도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여전히 과거의, 역사의 당사자가 나서야하는 시대적 아픔을 보여준다. 할머니는 과거를 잊고 싶을 것이고, 벗어나려할 것이다. 그런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고, 다시 한 번 들쑤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다.
나옥분 할머니가 ‘거사’를 치르기 전에 무덤을 찾는다. 과거를 꽁꽁 숨기고 살라고 했을 엄마의 무덤을 찾아 통곡하는 장면이다. “왜 그랬어. 왜 그렇게 망신스러워했냐고. 아들 앞길 망칠까 봐? 내 부모형제마저 날 버리는데 내가 어째 떳떳하게 살 수 있겠어. 불쌍한 내 새끼. 욕봤다. 욕 봤어. 한 마디만 해 주고 가지.”
잘난 공무원의 철든 동생이 그런다. “형은 할머니가 왜 오지랖 떨고 다니시는지 알아? 외로워서 그래. 할머니. 가족도 없이. 평생을 그렇게 외롭게 살아오셨어. 나옥분 할머니에게 그러면 안 돼.”라고.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명절 때 할머니가 혼자 라면을 끓여 잡수시는 장면이다. 할머니는 살아서 고국에 돌아왔건만, 가족도, 주위사람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가문의 수치라며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당시 8만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조선 처자들이 ‘위안부’로 끌려갔다. 해방이 되고 반세기가 지나서야(1991년) 이 나라는 피해자 접수를 받았다. 그 때 239명이 “내가 피해자요”라고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지금은 35명 만(9월 현재)이 살아 계신단다.
공무원은 6시 전까지 번호표 받고, 서류 접수하고, 결재라인에 도장받고 ‘종결’처리하면 된다. ‘복지부동’, ‘짜고 치는 고스톱’, ‘면피’. 그런 공무원이나 다를 바 없는 우리네가 이러고 있을 때 아마도 가장 웃고 있을 사람은 바다 건너 사람들일 것이다. 시간은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나옥분 할머니에게 그러면 진짜 안 된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