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시작은 느와르다. 으스스한 빗속, 재개발 직전의 상가건물을 훔쳐보는 수상한 시선과 이를 몰래 담는 카메라. 정체불명의 오프닝을 여는 주인공은 이 일대 민원왕이자 '오지랖 대왕' 나옥분(나문희) 할머니이다. 사소한 불법행위도 놓치지 않고 구청에 신고하는 할머니의 철저한 고발 정신은 시장 사람들과 공무원들에겐 그저 피곤한 일상일 뿐이다. 이때 새로 전근 온 9급 공무원(이제훈)이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자, 할머니는 간절하게 영어 과외를 청한다. 할머니가 왜 그토록 기를 쓰고 영어를 배우려 하는지, 그 사연이 웃음과 눈물 속에 이어진다.
영화는 중반부까지 명랑한 분위기를 유지하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묵직한 진실이 숨어 있다. CJ문화재단 주관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당선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위안부 문제를 유쾌하고 대중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큰 성과를 거둔다. 과거의 고통을 꽁꽁 숨긴 채 살아야 했던 할머니가 세상 밖으로 나와 "아이 캔 스피크"를 외치기까지의 과정은 시대적 아픔을 관통한다.
"왜 망신스러워했냐"며 엄마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는 장면이나, 명절에 홀로 라면을 끓여 먹는 할머니의 고독은 가슴을 친다. 가문의 수치라며 외면했던 가족과 사회의 냉대 속에서 피해자들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공무원들이 사무적인 서류 처리에 매몰되어 있을 때, 역사의 당사자들은 여전히 상처와 싸우며 증언대에 선다. "시간은 자기 편"이라 믿으며 사과를 미루는 일본을 향해, 우리는 이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나옥분 할머니를 더 이상 외롭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KBS미디어 박재환.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