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작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가 쓴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는 1929년에 출판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 영화는 1930년 11월에 열린 제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첫 번째 작품이며, 원작소설이 있는 첫 번째 수상작으로 기록된다. 레마르크의 소설은 100년이 지나도 감탄할 반전(反戰)소설의 정수이다. 전쟁과 죽음, 피다 만 청년의 꿈과 이상, 나아가 애국과 전체주의에 대한 피끓는 통찰을 다룬 작품이기에 시간이 지나도 그 위대함을 잃지 않는다. 원작소설은 1930년 한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고, 1979년 미국 CBS에서 텔레비전 영화로 다시 만들어졌었다. 의외로 영화화가 덜 된 작품으로 여겨졌던 이 위대한 원작이 최근 넷플릭스에서 만들어졌다. 그것도 독일에서. 레마르크의 숨결과 게르만의 손길과 넷플릭스의 재주를 지켜보시라.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 즉 프랑스와의 전선으로 배치된 신병을 둘러싼 지옥 같은 참전도를 그린다. 1차 대전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대량살상 시작이었다. 군인들은 전선을 따라 길게 판, 참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쏟아지는 포탄과 총알을 맞고 진창이나 다름없는 참호 바닥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며 ‘조국과 민족’을 떠올리는 것이다. 군인이 겪었을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트라우마는 소설을 통해, 영상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전쟁이 시작되자 ‘17살’ 파울 보이머는 열정적으로 참전을 독려하는 교사의 애국적인 웅변에 매료된다. 그렇게 어린 학우들은 독일제국의 영광을 위해 전선으로 배치된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로 보내진 그들에게 충분한 훈련과 보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전사자의 군복을 수거하여 세탁한 것이다) 전선에 배치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의 눈앞에는 살육의 무희가 시작된다. 여기가 전쟁터라는 것을 채 깨닫기도 전에 진창에 얼굴을 처박고 죽는다. 원작소설과 1930년 영화, 그리고 이번 넷플릭스 작품에서도 파울 보이머 병사가 겪게 되는 전쟁의 결정적인 순간을 관객은 함께 경험하게 된다. 얼떨결에 보내진 전선에서,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포연이 자욱한 전장에서 살기 위해 총을 쏘고, 칼을 내지르고, 야전삽을 휘둘러야하는 어린 소년의 변화를. 릴케와 헤겔을 논하며 휴머니즘과 행복을 꿈꾸던 그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목도하게 된다. 파울 보이머는 살기 위해 적군의 심장을 칼로 지른다. 그의 수첩에서 발견한 프랑스 군인의 가족사진.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라스트씬은 드라마틱하다. 원작소설에서는 1918년 10월, 눈에 띄게 평화로운 어느 날 죽임을 당한다고만 나온다. 그리고 그런 최전선의 전황은 한 줄 보고서로 상부에 전달된다. ‘Im Westen nichts Neues.’ “서부(전선)에는 새로운 소식이 없다”고. 처절한 전쟁이 끝나가는 마당에, 휴전을 앞둔 국지전 공방전에서, 병사 하나가 어떻게 죽었든, ‘새로운 소식’은 아니라고. 1930년 할리우드 영화에선,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보이머가 나비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손을 뻗친다. 그 순간 날아든 총알 한 방. 나비에게 뻗던 손이 땅으로 떨어진다. 보이머는 그렇게 죽은 것이다. 1979년 TV영화에서는 보이머가 참호에서 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는 종이를 꺼내 뭔가를 스케치하기 시작한다. 새를 더 자세히 보려고 머리를 드는 순간, 총을 맞는다. 순간 구겨지는 새의 그림! 이번 넷플릭스 버전의 마지막도 비극적이다. 휴전 나팔소리와 함께 마지막 숨을 헐떡인다.
모든 전쟁은 비극이고, 모든 전쟁에 내몰린 어린 병사도 비극이다. 넷플릭스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일찌감치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독일대표로 선정되었다. 독일어 제목이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이렇게 바뀐 것도 ‘서부전선 이상 없다’로 바뀐 것도 참으로 문학적이다.
1914년 전쟁 발발 후 전쟁의 양상은 참호전이 된다. 1918년 종전까지 전선의 이동은 거의 없었단다. 전쟁 기간 중 1700만이 목숨을 잃었고, 그 중 참호에서만 300만의 불꽃이 허망하게 꺼져갔단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감독: 에드워드 버거 출연: 펠릭스 캄머러(Felix Kammerer), 알브레히트 슈치, 다니엘 브륄, 세바스티안 휠크 2022년 10월 28일/ 147분 #박재환영화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