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조 감독의 장편데뷔작 <갈매기>는 임선애 감독의 <69세>(2019)와 궤를 같이 한다. 중년/노년의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뒤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부당한 대우에 맞서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의지이다.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가족의 지지에 연연하지 않고, 끝까지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굳센 의지. 법 집행의 문제보다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세워 일으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남은 삶보다는 살아온 삶에 대한 정당한 존중일 것이니 말이다. 오늘밤 KBS 1TV에서 방송되는 독립영화 <갈매기>는 그런 영화이다.
오복(정애화)은 세상일에 느긋한 남편을 다잡아 첫째 딸 인애의 상견례 자리에 간다. 생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평생 비린내를 맡으며 생계를 책임져온 오복은 딸 하나를 시집보내게 되어 기분이 좋다. 그래서인지 그날 밤 시장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밤늦게 축하주를 마시게 된다. 그런데, 그날 밤 무슨 일이 생기고 만 것이다. 이제 오복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시장의 상인들은 빨간 조끼에 노란 띠를 두르고 단일대오를 형성해야하는데 오복은 자신의 신상에 생긴 문제로 파열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결혼을 앞둔 딸에게도 미안하다. 다만 그 놈이 사과만 해도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런데, 시장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주위의 시선은 ‘별것도 아닌 일인데’, ‘미친개한테 한 번 물린 셈 치는 게...’ 식으로 피해자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폐쇄 시장의 안정과 여성의 정숙만을 요구한다. 그것은 흔히 보게 되는 2차가해의 모습으로 오복을 옭죄기 시작한다.
영화 <갈매기>에서는 중년여성 오복의 성폭행 사건을 다루면서 그녀가 당한 그날 밤 일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언급되지 않는다. 화면은 어두운 시장의 계단 잠깐 보여주고, 딸과의 대화에서도 서술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하지만 관객들은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게 된다. 김미조 감독은 ‘피해자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폭력의 재연’보다는 시급한 사태의 수습을 요구하는 듯하다.
과연 오복의 희망대로 일이 풀리게 될까. 현재 오복의 상황은 난감하다. 인륜지대사라는 큰 딸의 혼담이 진행되고 있다. 남편은 ‘사람 좋은 인상’만 주지 실상은 술이 세상의 낙일뿐이다. 딸 셋은 각자의 일로 엄마의 변화를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다. 배우지 못한 게 한이라는 오복으로서는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모른다. 재개발을 앞둔 시장 사람들의 비협조는 이기적이고, 중년 여성의 성폭행 피해를 쉬쉬하는 동료들의 외면은 비정하다.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성별, 연령에 상관없다. 김미조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단편을 통해 한국의 여성이 일상에서 받게 되는 폭력의 형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한국사회가 어떤지 아는 관객들은 <갈매기>가 전하고자 메시지를 이해할 것이다. 오복을 연기한 정애화 배우의 연기는 처연하다. 극중 오복의 마지막 행동에서는 결기가 느껴진다. 물론 감독은 그 마지막 피켓 신마저 철저하게 ‘피해여성 중심’의 시선을 견지한다. 김미조 감독의 <갈매기>는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을 수상했다. <갈매기>는 오늘 밤 KBS 1TV 독립영화관 시간에 방송된다.
▶갈매기 ▶감독/각본/편집: 김미조 ▶출연: 정애화, 이상희, 고서희, 김가빈, 2021년 7월28일 개봉/15세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