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史)에서 배창호 감독은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영화 인생을 보면 김수용, 임권택 같은 윗세대와 함께 강우석, 박찬욱 등이 겹쳐 보인다.(배창호 감독은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영화가 너무 좋아 생업을 포기하고 충무로에 뛰어든 돈키호테 같은 배창호 감독은 ‘꼬방동네 사람들’(82)을 시작으로 80년대 수많은 흥행작, 화제작을 내놓았고, 충무로가 자본의 힘에 지배되기 시작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독한 작가주의 길’로 밀려난 감이 있는 감독이다. 최근에 CGV에서는 데뷔40주년을 기념하여 배창호 감독 특별전을 마련했었다. 어제(12일)는 그의 비교적 덜 알려진, 즉 흥행이 덜 된 작품 <젊은 남자>(94)가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되었다. 배창호 감독은 만나 그의 영화인생을 들어보았다. 흥미진진했다!
Q. <젊은 남자>에서 잠깐 등장한다. 조감독으로 활약한 ‘바람불어 좋은 날’에도 출연했다는데 나오는 장면을 찾을 수가 없다. <개그맨>에서는 주연급 연기를 펼쳤었다.
▶배창호 감독: “아, ‘바람 불어 좋은날’에서 찍기는 찍은 것 같은데 편집에서 잘린 것 같다. ‘젊은 남자’에서는 초반에 이정재가 오디션 보는 장면에서 심사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영화에 나오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등장해도 무방한 역할, 감독이나 PD역할이어서 출연했다. ‘천국의 계단’에서도 감독역할로 나왔다.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에서는 연기를 펼쳤었다.”
* 배창호 감독은 스크린데뷔(!)작은 <어둠의 자식들>81이다. 이장호 감독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이 영화 첫 장면에서 ‘손님’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
Q. ‘젊은 남자’에는 로이 오비슨의 ‘인 드림스’(In Dreams)가 나온다. 음악 선곡은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스크롤에 스태프 가운데 ‘배병호’라는 인물이 있는데.
▶배창호 감독: “배병호는 신인작가인데 우연히 이름이 그렇다. 전혀 인척 아니다. 음악은 총괄은 작곡가에게 맡겼다. 오리지널 곡도 있고. 삽입곡은 조감독이랑 상의해서 넣었다. ‘인 드림스’는 시나리오 쓸 때 우연히 들었는데 영화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 같았다. 주인공은 뭔가를 갈망한다. 꿈을 좇는다.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Q. 영화 대사 중에 이정재가 이런 말을 한다. “나랑 손지창 중 누가 더 유명해질 것 같애?”
▶배창호 감독: “이 영화 찍을 당시에는 그런 것을 당사자에게 양해 받고 그러지는 않았었다. 그 당시에는 내 사진도 사용되고 그랬다. 그건 생활적인 대사니까.” (‘생활적인 대사’가 낯설게 들렸다)
Q. ‘젊은 남자’ 촬영 당시 이정재는 무명에 가까웠다.
▶배창호 감독: “‘젊은 남자’ 촬영하면서 드라마 ‘모래시계’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정재가 곧 군대에 가야했기 때문에 촬영이 타이트하게 진행되었다. 11월에 방송이 시작되었는데 그 작품으로 무지하게 떴다. ‘젊은 남자’를 그 드라마 끝나고 개봉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이정재는 ‘젊은 남자’로 국내 영화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젊은 남자’ 주인공을 뽑기 위해 신인급 연기자들을 다 찾아보았다. 영화배우, 탤런트. 이정재가 이 영화 배역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잘 소화해낼 것이라고 느꼈다. 그런 확신이 있어서 캐스팅했다. 이정재는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빨랐다. 자신이 맡은 인물을 즉각적으로 이해했다. 촬영을 어느 정도했을 때 ‘저에게 불만이 있으신가요? 왜 연기에 지적을 안 해주세요’라고 묻더라. 그래서 내가 ‘지금 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고 말했다. 물론 대사하는 것 조금 고쳐줬다. 배역을 잘 이해하고, 잘 표현해 주었다. ‘젊은 남자’는 이정재 말고도 신은경, 이응경과 함께 박중훈이 우정출연 했었고, 권오중, 강성진이 나왔던 나름 캐스팅이 탄탄했던 작품이다.“
Q.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이정재의 경우 뒷모습이지만 전신누드이다.
▶배창호 감독: “아, ‘공사치고’ 딱 그 장면만 조심스레 찍었다.”
Q. 배창호 감독은 대기업 해외지사를 그만두고 영화판에 뛰어든 돈키호테 같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배창호 감독: “현대종합상사 공채1기이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은 본 적이 없다. 그 때 현재가 공격적으로 해외지사를 넓혔는데 사원에게도 기회가 주어졌었다. 단신으로 아프리카 케냐에 갔다. 지사장 겸 지사원이었다. 그 곳에 있을 때 케냐 국영어업공사에 참치잡이 어선 2척을 팔았다. 300만 불에. 한국이 동아프리카 국가에 처음으로 선박을 수출한 케이스이다. 운이 좋았었다.” (대담집 <배창호의 영화의 길>에서는 ‘200만 불이 넘는 수출실적’이라고 나와 있다)
Q. 배 감독님의 영화판 입문을 다룬 옛날 자료를 찾아보니, 젊었을 때 영화사 대표를 찾아가서 무조건 무릎 꿇고 “날, 기획실장 시켜주면 1년에 흥행작 3편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는데. 사실인가?
▶배창호 감독: “하하. 무릎 꿇지는 않았다. 이건 10년 쯤 전에 한 번 해명한 적이 있다. 화천공사 박종찬 사장님을 찾아갔었다. 대학선배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일을 최인호 선배가 글을 쓸 때 ‘돈키호테’같은 행동을 강조하기 위해 재밌게 썼던 것이다. 팩트는 그렇다.”
(대담집 <배창호의 영화의 길>에도 그 질문이 나왔는데, 배 감독은 “최인호 선배가 <스크린>영화잡지에 그렇게 쓴 적이 있는데 그것은 저돌적인 행동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되게 묘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것을 팩트로 여겨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웃음)"라고 해명한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간된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책 <이장호 VS 배창호>에도 ‘무릎 꿇은’ 이야기가 나온다)
Q. 대기업 걷어차고, 충무로에 뛰어들었는데, 두렵지는 않았는지.
▶배창호 감독: “당시(80년대 초반)는 영화인들이 똘똘 뭉쳐서 작품을 만들던 때이다. 감독에게 재량권이 많이 주어졌던 좋았던 시절이어다. 젊은 열정에 막상 들어와 보니 쉽지가 않았다. 퇴직금도 다 쓰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힘든 시절을 겪어야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하고 싶은 것과 정말 잘하고 싶은 것은 다르니까. 영화계 입문 초기에 기자 선배가 내게 그러더라 ‘창호야, 너 깡통 찬다’고. 그 말이 불쑥불쑥 생각났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Q. 영화감독의 꿈은?
▶배창호 감독: “어릴 때 부모님 따라 동네극장 많이 다녔다. 어릴 때는 감독이 뭔지도 몰랐고. 배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전문서적도 없었다. 대학 가니 영화동아리도 없었다. 연극반에 들어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하고 그랬다. 그때 배우보다는 감독이 더 맞을 것 같았다. 그게 어느 시점에 딱 온 것은 아니다. 감독이 되고 나서는 독학했다. 프랑스문화원에서 평소 접할 수 없었던 작품들을 보고나서 집에 와서는 씬 별로 장면을 정리해 보고, 다시 가서 한 번 더 보고 그랬다. 당시엔 비디오도, DVD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영화잡지도 없었다. 영화에 대해 굶주렸던 때다. 케냐에 갔더니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은 훨씬 나았다. 당시 한국은 외화수입이 쿼터제로 20편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케냐에선 최신 영화가 그냥 소개되는 것이었다. 참, 많이 보았다. 시나리오도 써보고. 8밀리 단편도 만들어보고 그랬다. 그 후 한국 들어와서 조감독 생활하면서 현장도 익히고 그랬다.”
Q. ‘꼬방동네 사람들’로 화려한 데뷔를 했다. 그런데 그런 영화가 당시 개봉되기기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제작뿐만 아니라, 심의단계, 그리고 극장잡기가 다 어려웠을 것 같다.
▶배창호 감독: “‘꼬방’은 ‘하꼬방’이란 말에서 왔다. 그때도 개봉관 잡기는 어려웠다. 소위 관객들이 많이 몰리는 입지가 좋은 극장이 있었다. 한국영화는 우선 개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당시에 제작자분이 과감하게 극장을 결정하였고, 신인감독으로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꼬방동네 사람들’이 개봉한 ‘푸른극장’ 측에서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해서 많이 알려졌다. 그 당시 영화를 본 관객들이 입소문을 내 주어서 관객이 꾸준히 몰려오더라. 평론도 좋았다. 영화평론가 김종원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데뷔작으로 평론가협회 작품상’을 받았을 만큼 말이다.”
Q. ‘꼬방동네사람들’은 1984년 개봉작이다. 40년 전, 영화평론은 어떠했나. 영화평론가는 흔치 않은 직업군이었으니. '정성일' 말고, '정영일'이란 분이 기억난다. KBS <사랑방중계>라는 프로그램에 나왔었고 매주 KBS [명화극장] 방영작을 소개해 주던 분이다. 조선일보에 영화평을 게재했었다.
▶배창호 감독: “그분은 영화 개봉하면 첫 날 첫 회 아침에 와서 영화를 보신다. 영화가 좋으면 전화를 주신다. 나오라고 하신다. 밥 먹으면 영화이야기하고. 장단점 짚어주고 격려해주셨다. 어느 날인가 내가 방송에서 인터뷰하며 ‘무대포’라고 말했더니 전화를 주시더라 ‘그건 일본말이야’라고. 그런 이야기도 해주고 그랬다.”
Q. 당시엔 신문에 난 영화광고를 보고 극장을 찾는 것이 정석이었다. 옛날 신문에 난 ‘꼬방동네사람들’ 광고를 보면 당시 흔한 ‘에로영화’ 스타일이다.
▶배창호 감독: “그땐 그랬다. 에로영화란 것도 있었고. 관객들을 유인하는 스틸이나 광고문구가 사용되었다. 감독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 당시에 지방 가면 내 이름이 ‘배장호’나 ‘이창호’로 표기되어 있기도 했다. 사진도 이장호 감독이 쓰이기도 했다.”
Q. ‘꼬방동네 사람들’로 화려한 데뷔를 하고 두 번째 작품은 국책영화라고 할 수 있는 ‘철인들’이었다. 어느 해인가. TV에서 방송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대기업(현대중공업) 자본으로 만든 것이니, 제작여건은 더 좋았을 것 같다.
* 한진흥업이 제작한 영화 [철인들]은 1970년대 중동건설 붐을 일으킨 시초가 된 현대중공업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공사 초대형 철 구조물(플랜트) 수출 과정을 극화한 작품이다 *
▶배창호 감독: “[철인들] 감독 제의가 들어왔었다. 조건이 좋았다. 흥행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작품이었다. 당시 대종상 작품상은 세 개 부문으로 나뉘어있었다. 문예/계몽/반공 식으로. 여기서 작품상을 타면 제작사에게는 외화수입 쿼터를 한 편씩 주어졌다. 제작사/극장 입장에서는 그게 큰 기회였다. 그런 목적으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난 계몽적 성격을 직접 내세우지는 않았다. 산업전사들의 애환과 협동심을 보여주려고 했다. ‘철인들’이 상을 받았고, 그 외화쿼터로 어떤 영화를 수입했는지는 모르겠다. 영상자료원에서 2008년에 전작전을 할 때 상영한 적이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다. 10억불짜리 프로젝트를 수출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역사적인 가치도 있을 것이다.”
Q. 감독님은 80년 중반 충무로에 큰 바람을 불러왔었다. 그리고 작품 활동이 뜸해졌다. 그러다가 [흑수선]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그 때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배창호 감독: “‘흑수선’은 내가 만들자고 제작자에게 제안한 작품이다. 김성종의 ‘최후의 증인’을 바탕으로 해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었다. 오랜만에 ‘제도권’에서 영화를 찍은 것이다. 한국영화계도 노하우가 쌓여 인프라가 구축되었다는 것은 느꼈다. 그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많이 했다. 고전적인 스타일이 이야기가 잘 어울릴 것이라고 보았다. 관객들의 호불호가 있었다. 기성세대들은 나의 연출스타일을 알고 영화를 이해하였지만, 젊은 층은 낯설어하더라. 아쉬움이 남는 것은 대사 부분이다. 문어체 말고 구어체로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분장 문제는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한 작품이다.”
Q. 그 전 해에 ‘정’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보는 한국 정통문예물이었다.
▶배창호 감독: “정은 아마 내 작품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본 작품일 것이다. 스페인의 어느 관객이 유튜브에 스페인 자막을 넣어 올렸더라. 1200만이나 보았더라. 난 ‘정’ 같이 생명력이 긴 영화를 원한다. 당장에 눈길을 끄는 영화보다.”
Q. 감독님은 다양한 영화를 만들었다. 공통적으로 담고자 한 것이 있다면?
▶배창호 감독: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출을 한 것 같다. 어떤 스타일의 영화든 다양하게 했다. 그 이야기에 맞는 표현법을 사용하려고 했다. 눈물이 나는 영화에서는 눈물을, 유머가 필요한 영화에선 유머를 넣었다. 일관된 것은 본질적인 삶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그리려고 했다.”
Q. 지금 근황을 조금 알려주시면.
▶배창호 감독: “울주국제산악영화제 집행위원장을 4년 넘게 하다가 이번에 물러났다. 영화제도 이제 자리를 잡았고, 나도 영화인 본연의 임무에 전념하고 싶었다.”
Q. 향후 계획은? 영화를 찍을 계획은 있는지.
▶배창호 감독: “최근에 책(대담집 <배창호의 영화의 길>)을 출간하며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삶을 영화로 만들 것이다. 글로벌한 프로젝트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서 승천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3부작으로 만들 계획이다. 복음서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고, OTT는 나중에 공개할 것이다.”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는 1994년 12월 17일 개봉되었고, 28년 만에 극장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되었다. 이정재, 신은경, 이응경, 김보연, 전미선 등이 출연한다. 배창호의 1990년대 감성, 이정재의 풋풋한 신인 시절을 만나보고 싶다면 극장을 찾아가 보시라. 그리고, 혹시 배창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대담집 <배창호의 영화의 길>도 읽어보시길. 배창호 감독의 전작에 대한 회고적 이야기로 가득한다. 이 책에서 배창호 감독은 <깊고 푸른 밤>과 <고래사냥2>로 자신의 영화인생의 한 챕터를 끝내고, <황진이>로 또 다른 작가의 길을 나설 때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을 길>(The Road Not Taken)을 직접 번역해서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다.
[사진=(주)스튜디오보난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