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상황을 아시는가. 그 전 해, 1979년 10월 26일 장기집권 박정희 대통령이 안기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고, 얼마 안 있어 1212 쿠테타가 일어나며 전두환이 실권을 장악했다. 이른바 갑자기 주어진 ‘서울의 봄’에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이라는 3김이 기지개를 펴는 짧은 봄이 있었다. 수십 년간 억눌린 민심은 꿈틀거렸다. 특히 대학가는 활화산 같았다. 시위가 격화되자 전두환은 전국에 계엄령을 내린다. 그 시절 광주는 어땠을까.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 전화선과 방송, 기자들만 붙들어 두면 광주의 일은 저 아프리카 어느 밀림 속 상황과 마찬가지로 깜깜무소식이 되어 버린다.
<영화는 영화다>와 <의형제>, <고지전>을 감독한 장훈 감독은 1980년의 광주를 영화로 만들었다. 광주시민의 모습을 다루면서, 새로운 관찰자를 집어넣었다. 외국인, 그것도 기자를!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기본으로 한다. 당시 일본특파원이었던 ‘피터’는 동경 프레스센터에서 동료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금 광주에서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런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고. 피터는 그길로 바로 김포공항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피터는 택시를 타고 광주로 향한다.
피터를 태운 사람은 서울의 택시기사이다. 송강호는 당시 택시운전사가 지녔을 마인드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데모를 하는 대학생들 때문에 공기는 (최류탄으로) 메케하고, 도로는 막히고, 손님은 없다. 당연히 사납금도 못 맞출 정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너네들이 열사의 땅에서 고생을 해봐야. 한국이 정말 살기 좋은 곳이구나 할거야”라고. 피터 기자가 통금 전까지 광주를 다녀오면 거금을 준다는 소리에 얼씨구나 하고 나선다. 그런데, 광주 길목에 군인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막아선다. 그제야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다.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는 대한민국 군인들이 쏜 총으로 피바다가 된다. 특히 시위대가 마지막까지 항전한 전남도청은 끔찍했다.
장훈 감독은 피터와 송강호 기사,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광주에서 만나는 대학생과 시민과 함께 이동하면서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끔직한 조준사격과 끔찍한 주검을 보게 되고, 그 모든 장면이 피터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긴다.
1980년 일어난 광주의 일은 - 그 시절 외부의 사람들에겐 - 격리되고 박제된 역사였다. 대부분의 사람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5~6년이 지나서 알음알음 알기 시작한다. (1985년 신동아와 월간조선 같은 시사잡지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물론, 당시 대학가에서는 당시의 끔직한 사진과 비 내리는 비디오를 통해 “그런 사실이 실제 있었음”을 알리기 시작했다.
광주에 피바람이 분지 올해로 37년이다. 망월동 묘지에서 아버지 무덤 앞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그 아이도 이제 중년이 되었다. 전두환은 자서전을 통해 여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한다. 장훈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광주의 아픔을 다시 한 번 전한다.
전작들을 통해 드라마틱한 스토리 전개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장훈 감독은 <택시운전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감정선을 건드린다. 피터 기자와 진짜 이름을 지금도 알 수 없는 택시운전사가 겪은 광주에서의 이틀을 이야기하면서 필요이상의 상상력을 가미한다. 류준열의 이야기는 필수적이겠지만, 할리우드 카체이스 같은 추격전은 영화의 '역사성'을 반감시킬 수 있다. 오히려 장훈 감독이 광주시민의 눈물과 도청의 총알자국에 더 시간을 할애했더라면 <택시 운전사>는 <변호인>의 반열에 올랐을 텐데 아쉽다.
송강호의 천연덕스런 택시운전사 연기는 확실히 명불허전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류준열의 연기도 역대급 인생캐릭터 연기였음이 분명하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