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필, 국내에서는 조동필이라는 한국 이름까지 팬들에게 얻게 된 이 감독은 사회적 함의를 담은 영화 '겟 아웃', '어스'를 포함한 전작들로 영화계에서 인정을 받아왔다.
그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작품들을 연출해왔다. 전작 '겟 아웃'에서는 얼굴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회 깊이 뿌리내린 인종차별 사상에 대해 지적했고, '어스'에서는 또 다른 우리가 존재하는 반대편 미지의 세상에 대해 그려나갔다.
그런 그가 야심차게 내놓은 이번 신작 '놉'은 전작들에 이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심을 극한의 상상력을 통해 끌어내고, 자극하고, 각인시킨다. 헤이우드 말 농장에서 말 조련사로 활동하는 OJ(다니엘 칼루야 분)가 미스터리한 존재를 마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공포스러우면서도 대담한 시퀀스들이 연속적으로 연결되며 결말을 향해 달려나간다.
'놉'의 시작은 1998년도의 한 시트콤 촬영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의 영상이다. 이는 작품이 흘러감과 동시에 조금씩 확장되어 제공되는 영상으로, 중간중간 삽입되는데 작품 전체를 이어주며 앞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의미 또한 짚어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작품을 관통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단란한 백인 가족과 입양된 것으로 추측되는 아들 주프(제이콥 김 분), 그리고 반려동물 침팬지 고디가 출연하는 이 시트콤은 고디의 생일날 생일 선물을 선사하며 행복하게 시작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금세 분위기는 반전된다. 헬륨 가스가 든 풍선이 상자에서 튀어나오고 그 풍선이 터지자 그 현상에 영향을 받은 고디는 모든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출연자들을 살해하거나 큰 상처를 입히게 된다. 피바다가 된 촬영장 속에서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주프 뿐이다.
이후 어른이 된 주프(스티븐 연 분)는 시트콤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 돌아올 수 없었던 자신의 전성기를 추억하며 살아간다. 고디와의 시트콤에 출연하기 전 어린 시절 자신을 스타로 만들었던 시리즈인 '꼬마 보안관'을 모티프로 삼은 테마파크인 주피터 파크를 열어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서부 시대 테마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한다.
한편 현재, 갑자기 하늘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물건들을 발견한 OJ는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방금까지도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아버지가 갑자기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달려간 그는 아버지가 하늘에서 떨어진 동전을 눈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음을 목격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유쾌한 성격의 여동생 에메랄드(케케 파머 분)는 생계를 잇기 위해 활발하게 살아가지만 그에 비해 우울한 모습을 보이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OJ는 우울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아버지를 죽인 그 무언가가 하늘에서 사라지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마침 에메랄드와 OJ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금난에 시달려 말들을 순차적으로 팔고 있던 차, OJ는 그것을 카메라로 촬영해 비싼 값으로 팔기 위해, 에메랄드는 이로 인해 유명세를 얻어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오기 위해, 각자 명예와 부라는 목표를 가지고 미스터리한 물체를 쫓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읽지 않기를 권고 드립니다.
"나쁜 기적이라는 것이 있을까?"
영화 '놉'은 공개된 이후 호불호가 갈리는 리뷰, 그리고 각 장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진 작품이다. 이는 거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의 후기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 정도다. 당시 댓글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스포를 하고 싶어도 스포를 하지 못한다'였는데 정말 말 그대로다. 아무래도 과거 시트콤 사건과 현재 헤이우드 목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공통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쏟아지는 힌트들의 쓰나미에 많은 이들이 허우적댄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매우 만족스러운 이유는 조던 필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에 있다. SF 장르와 스릴러를 결합한 신선한 장르에 흑인 가문 헤이우드가 물려받은 말 목장에서 외계의 존재와 마주한다는 이야기 흐름은 타 감독의 손에서는 탄생하지 않았을 시나리오다. 이어 비행접시 형태의 물체를 보고 우주선이라는 물체일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무언가를 흡입하고 배설하는 하나의 생물체였다는 사실조차도 이때까지 상상했던 SF 장르 영화의 예상될만한 클리셰를 뛰어넘는다.
더불어 과거 시트콤 사건과 현재 헤이우드 목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나열하며 서로를 이어지게 만드는 방식 또한 흥미롭다. 작은 소품, 연출 장치들 속에는 두 사건을 이어지게 만드는 포인트들이 담겨 있다. 그중의 하나가 작품 초반부, 시트콤 참사 현장에서 피해자의 피 묻은 신발이 이상한 형태로 꼿꼿이 서있는 모습이다. 이는 나중에 등장하는 대사 "나쁜 기적이라는 것이 있을까?"와 이어지는 포인트로 헤이우드 목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나쁜 기적' 자체를 보여주는 예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쇼'다. 등장인물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즐거움을 주기 위해 엔터테인먼트를 제작한다. 과거의 시트콤도 그러했고 외계 생물체의 존재를 이용해 쇼를 만들려는 주프의 야심, 에메랄드와 OJ의 일명 '오프라 샷'을 찍기 위한 분투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시트콤과 주프의 경우 결과는 참극으로 돌아온다.
사희적 함의를 매번 전작들 속에 넣어왔던 조던 필 감독의 작품 세계를 감안했을 때, 이는 다른 생명체를 인간이 자신의 발밑에 두고 길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의 오만을 지적하는 의미로 추측된다.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 생명체를 대했던 이들은 생명체가 당연하게도 지니고 있는 자유 의지와 힘을 간과했기에 그러한 참극을 당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트콤을 찍다가 헬륨 가스 풍선이 터져서 순간 폭발해버린 침팬지 고디, 그리고 헬륨 가스가 가득 찬 풍선을 먹고 터져서 죽어버리는 외계 생명체의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인간을 공격했고 무서운 존재여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 속 본질에는 인간의 욕심이 근원이었기에 마냥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들을 '쇼'의 한가운데로 몬 것은 인간이다.
그러기에 더욱, 과거 고디에게서 폭력 피해를 입지 않고 유일하게 살아남았기에 이번에도 '쇼'의 일환으로 길들일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던 주프가 외계 생명체로 빨려 들어가기 전 짓는 표정연기는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덧붙여, 조던 필 감독은 전작들에서도 넣어왔던 흑인 인권 관련 이슈를 또 한 번 언급한다. 처음 에메랄드가 자신과 자신의 조상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이 부분이 드러난다. 에메랄드는 세계 최초의 영화는 에드워드 머이브리지가 연속적으로 흑인 기수가 말을 타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만든 영상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OJ와 에메랄드의 조상인 그 기수는 최초의 영화에 출연한 최초의 영화배우지만 현재 이름조차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 반대로 그것을 찍어낸 백인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의 이름은 기억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부분은 작품의 결말에 나오는 요소와도 신기하게 이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에메랄드가 미스터리한 존재와의 최후의 전투에서 과거 연속적으로 사진을 찍어서 흑인 기수의 영상을 만든 것처럼, 테마파크의 사진관에서 연속적으로 사진을 찍어 그의 존재를 포착한다. 마치 동물의 움직임을 연구하며 연속 사진집을 만들어왔던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처럼 연속적으로 외계 생명체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에 성공한다. 이는 결국 에메랄드가 이루고자 했던 '오프라 샷'을 완성시키고 명예와 부라는 목표를 달성해내는 순간으로 사진을 찍고 이름을 알리게 되는 이가 과거에는 백인이었다면 현재에는 흑인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놉'에는 이외에도 기사 페이지에서 문자가 범람해버릴 만큼 엄청난 의미들이 다양한 곳곳에 숨어있는 작품이다. 보물찾기 같은 영화가 반가운 이들이 아마 '놉'을 만난다면 이 작품의 끝으로 달려나가기 위해 N차 관람 탑승을 부단히 이어나갈 것이라 확신한다. 8월 17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