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그라벨 감독의 ‘풀타임’(원제: À plein temps/Full Time)에서는 민주주의가 꽃피고, 자유경제가 살아 숨쉬는 프랑스 파리의 생생한 오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에펠탑은 불야성을 이루고, 센느강에는 낭만이 흐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쥘리(로르 칼라미)는 그런 낭만을 즐길 여유가 전혀 없다. 파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교외에서 매일 출퇴근 전쟁을 펼쳐야한다. 겨우 그 정도? 아니다. 훨씬 심각하다.
쥘리는 이혼 후 아이 둘을 홀로 키우고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들을 이웃집 할머니에게 맡긴다. 마음 놓고 맡길 친척도, 기관도 없다. 파리를 향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달린다. 전국적인 교통 파업이 일어나 출근길은 엉망이 된다. 기차는 연착하고, 대체버스는 오지를 않는다. 히치하이킹으로 겨우 파리에 와서 직장인 호텔로 달려간다. 근사한 호텔리어가 아니다. 손님이 오기 전에 룸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온갖 잡일을 해야 한다. 퇴근길도 구만 리. 기차도, 버스도, 동승할 차도 없다. 아이도 데리러 가야한다. 그 와중에 전 남편에게 양육비를 보내달라고 전화로 읍소해야한다. 그 인간, 전화조차 안 받는다. 은행대출 만기 독촉전화는 쏟아진다. 쥘리의 마지막 희망은 더 나은 직장을 알아보는 것. 하지만 면접 보러갈 틈이 없다. 호텔은 잠깐만 자리를 비워도 바로 잘린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쥘리는 어떻게든 파리로 출근해서,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아이들은 어떡할 것인가.
영화 [풀타임]은 쥘리의 직장인의 고달픈 출퇴근과 싱글 맘의 고달픈 육아가 풀타임으로 채워진다. 아이 봐주는 것이 힘에 부친 이웃이 그런다. 차라리 파리 근처로 이사 가는 것이 어떠냐고. 쥘리는 안다. 파리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이란 게 어떤 수준인지.
영화에서 쥘리가 어느 날 고급객실의 욕실을 치워야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톱스타가 하루를 묵은 그 방 화장실은 엉망진창 그 자체. 쥘리는 마지막 수단으로 고압살수기로 벽을 치운다. 관리자가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의 똥을 치우고 싶지 않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쥘리는 오늘도 그 고급호텔에 시간 맞춰 출근해야한다. 살.기.위.해.아.이.를.양.육.하.기.위.해.
쥘리는 이런 상황에 처한 모든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대변할 뿐이다. 아이도 키워야하고, 돈도 벌어야하고, 삶도 유지해야한다. 그것은 최상의 것을 기대하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것이다. 그 사이 우편함에는 청구서가 쌓일 것이고, 스트레스로 속은 썩어문드러질지도 모른다.
쥘리는 TV뉴스와 라디오 교통방송에 매달린다. 파업이 풀리기를, 교외로 가는 기차가 있기를 애타게 기원한다. 에릭 그라벨 감독은 쥘리가 처한 상황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회사는 제 시간에 가야하고, 기차는 멈춰섰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까. 원칙의 벽과 자유의 숭고함 앞에 무너지는 무력한 자아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는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와 맥을 같이 한다. 그렇다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만큼 슬프지는 않다. 정말 다행이다. 이 영화는 작년 열린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오리종티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22년 8월 18일 개봉/전체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