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KBS 독립영화관에서는 제주도의 푸른 밤을 만끽할 수 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낭만적 느낌일까 아니면 4.3 비극의 어두운 그림자를 만나는 아픔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영화이다.
영화 ‘빛나는 순간’은 제주 해녀의 삶의 한 편의 다큐에 담으려는 젊은 남자 피디의 이야기이다. 진옥(고두심)은 ‘바다에서 숨 오래 참기’로 기네스북에 오른 해녀이고, 경훈(지현우)는 그런 베테랑 해녀의 이야기를 오롯이 담고 싶어서 서울에서 날아온 피디이다. 경훈의 생각과는 달리 진옥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큐에 담기는 것을 극구 반대한다. 진옥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경훈은 몇날 며칠을 따라다니며 공을 들인다. 그러던 어느 날 경훈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더니 깊은 바다 속으로 빨려들 때 진옥이 구해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가슴에 품은 상처를 이야기하며 감정의 격류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다큐’는 완성되었지만 진옥과 경훈의 이야기는 제주 앞바다에서 맴돌게 된다.
● 에로틱 아일랜드 로맨틱 스토리...가 아니다
‘빛나는 순간’을 만든 소준문 감독은 이송희일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동백꽃-떠다니는 섬’, ‘올드 랭 사인’ 등 몇 편의 ‘퀴어’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빛나는 순간’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제주 출신의 중견배우 고두심을 해녀로 내세운 정서적 울림이 큰 드라마이다. 70세 해녀로 분한 고두심과 30대 피디 지현우의 사랑을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것은 로맨스일 수도 있고, 판타지일 수도 있는 에로틱한 드라마이다.
제목으로 쓰인 ‘빛나는 순간’은 영화에서 두 사람이 숲에서 마주친 꽃-상사화(相思花))-을 두고 나누는 대사에 등장한다. 울창한 수풀, 고요한 산속에 두 사람이 걷다가 멈춰 선다.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 나고 어디선가 벌레 소리도 들린다. 그 곳에 상사화가 피어있다. 진옥이 그 꽃에 대해 말한다. “이건 멍충이스님꽃이야. 얼마나 그 여인을 사모했으면.. 좋아한다는 말 전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이 꽃이 되었지.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나올 때는 꽃이 없어. 참 가여워.”라고. 두 사람의 운명처럼. 이 상사화는 동굴 속 이야기에 이어 경훈이 덧붙인다. “꽃이랑 잎이랑 그 둘이 만나는 짧지만 빛나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그 누구도 모르는, 둘만이 간직한. 그래서 더 소중하고 그래서 더 애틋한 것 같아요.” 진옥과 경훈의 이야기가 ‘특이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라는 감독의 설명을 듣게 되는 셈이다.
● 제주도 푸른 밤, 그리고 검은 바다
영화는 제주도의 특이한 극(極) 연상연하 로맨스를 이야기하면서 제주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진옥은 오래전 자신이 갓난 아이 때의 이야기를 한다. ‘잔인했던 그 날, 그 봄 산 속 동굴’에서 벌어진 가족비극을. 제주 4.3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춰 경훈도 ‘3년 전 사고’로 이 곳 바다 속으로 사라진 자신의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하며 흐느낀다. 분명 인천항을 떠나 제주로 향하던 그 배를 염두에 둔 것이리라. 감독은 개인의 비극과 슬픔을 거대서사에 기댄다. 또 그러면서도 그 거대 담론을 연상연하 로맨스로 치환시킨다. 관객들은 그 사이에서 아픔을 공유하고 슬픔을 나누게 된다.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살암시믄 살아지매.”라고. ‘살다보면 살아진다’고. 그 말을 가슴에 품고 바다 속에 들어갈 때도 숨을 참을 수 있고, 살아가며 힘든 일이 있더라도 전부 다 이겨낼 수 있다고.
70세 해녀 진옥과 30대 경훈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상사화’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다. ‘빛나는 순간’은 그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은 어쩌면 경훈의 샤워 씬일 것이다. (남편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진옥은 그 순간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격동적 심리상태에 빠진다. 아마도 이 부분은 소준문 감독이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일 듯하다. 멀리는 D.H.로렌스의 [차탈레 부인의 사랑]의 등목 신에 잇닿아 있을 장면이다.
‘빛나는 순간’은 흔들리는 마음을 눈빛으로 연기해낸 고두심의 열연이 작품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게 만든다. 그리고 지현우 역시 내면의 상처를 안고, 그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어촌 계장 영덕을 연기한 사람은 ‘지슬’에 나왔던 제주 출신 배우 양정원이다. 영덕의 딸 설희 역은 전혜진이 맡았다. 원로영화인 유순철은 코마 상태로 줄곧 방안에 누워있는 남편을 연기한다.
참, 영화 마지막엔 아이유의 ‘밤편지’가 흘러나온다. 밤과 파도, 그 모래 위에 써두었던 그리움의 말이 아련히 떠오를 것이다.
▶빛나는 순간 감독:소준문 출연: 고두심 지현우 양정원 전혜진 김중기 ▶2021년 6월 30일 개봉 12세관람가 #영화리뷰 #박재환 KBS미디어
[사진=㈜명필름, 웬에버스튜디오, 명필름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