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 영화에 대한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제 대법원이 나이만을 기준으로 한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판결을 내놓았다. ‘임금피크제’는 이미 많은 공기관과 대기업에서 활용되고 있는 제도이다. ‘임금 노동자’의 권익보호라는 명분으로 활성화된 제도이다. 예전엔 심심찮게 그런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무실의 자기 자리가 치워졌다고. 정말 책상을 빼서 복도에 내놓거나 아니면 지하실에 갖다 놓는다고.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안겨주어 수십 년 일한 직장에서 제 발로 걸어 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존버’ 사회이다. 그 과정에서 ‘임금피크제’가 논의되고 착근한 것이다. 오늘 밤 KBS 독립영화관 시간에는 조금 특이한, 어쩌면 많은 직장에서 은밀하게 사용되고 있을지 모를 ‘해고의 묘수’를 보여준다.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나 직장 내 성추행, 갑을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사원 쫓아내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배경은 서울에 본사를 둔 지방의 지사 사무실이다. 어느 날 이현제 대리(조대희)에게 뜻밖의 임무가 주어진다. 본사에서 모종의 사건으로 이곳으로 좌천된 이혜원 대리(이나원)를 관리감독하라는 팀장(박성일)의 비밀스런 오더였다. 본사에서 으스대던 여직원을 갱생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불편한 환경을 만들어 자연스레 사표를 내게 하라는 것이다. 남들은 다들 사무용 의자에 앉아 있지만 이혜원에겐 불편한 의자가 주어진다. 전형적인 왕따와 무시, 냉대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혜원 대리에겐 적절한 업무를 주지도 않고, 점심이든 회의든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회사가 왜 이리 비인간적으로, 집요하게 사람을 내쫓으려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이혜원 대리는 꿋꿋하게 버틴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자술서(?)를 쓰면서 고통의 시간을 감수한다.
■■■■■스포일러 주의 ■■■■■ 회사에서는 신분증을 회수한다. 이현제 대리는 이혜원 대리가 업무를 깔끔하게 처리한다는 알게 된다. 그리고 본사에서 어떤 치정/스캔들/로맨스 같은 사적 감정이 얽힌 일 때문에 (남자는 서울에 남고) 여자는 이곳으로 내쫓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녀간의 문제는 알 수 없으니. 근데 왜 여자(부하여직원)만 좌천되고, 사표를 강요받는지 모를 일이다. 영화는 이혜원 대리의 불안하고, 불합리한, 그리고 불리한 상황이 이어진다. 과연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어떻게 되냐고? 이혜원 대리는 자살한다! 뒤늦게 경찰이, 본사 감사팀이 내려와서 법석을 떨지만 ‘故 이혜원 대리’가 이길 것 같지는 않다. 이혜원 대리가 앉았던 자리에는 새로운 직원이 앉는다. 불편한 의자가 아니라 편안한 사무용 의자이다.
이현제 대리는 신입사원 면접 자리에 배석하게 된다. 서류를 뒤적이던 채용담당자가 이렇게 묻는다. “인권단체 경력이 있으시네요? 그럼, 회사가 직원들을 정리해고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자 면접자는 자신에 찬 목소리도 대답한다. “조직쇄신이라는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낡은 피를 비워내고 신선한 피를 수혈하는 게 기업을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충분한 기회를 줬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직원들은 정리하고 새로운 도전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보다 효율적인 조직운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름끼치는 모범답안이다. 사회는, 직장은, 인권운동은, 밥그릇 전쟁은, 임금피크제는, 취업은 현실이다. 이혜원 대리는 ‘존버’했어야 한다. 오늘밤 [독립영화관]은 우리 사회의 아주 묵직한 과제를 던져준다. 이시대 감독은 잔재주나 트릭 없이 정공법으로 ‘문제의 핵심’을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