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로 시작하는 말은, 강재훈
증권회사 지점장 이병헌은 부실채권을 고객에게 팔았다가 모든 것이 무너진다. 전 재산을 날린 고객들이 들이닥쳐 멱살잡이에 뺨을 때린다. 집에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도 없다. 아내와 어린 아들은 호주로 영어 배우러 떠났다. 기러기아빠 이병헌은 독한 술잔을 들이키며 고객에 대한 죄송함과, 뒤늦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휴대폰으로 아들이 보낸 호주의 동영상을 본다. 태즈매니아(Tasmania)란다. 파도가 치는 백사장. 이병헌은 가족이 보고 싶다. 타스매니아가 보고싶다.
영화 <싱글라이더>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자연스레 ‘이병헌’이 되는 영화이다. 돈이 뭔지, 출세가 뭔지, 사는게 뭔지.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어느 순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낯선 호주 시드니의 주택가를 방황한다.
영화는 조용하게, 그러나 격한 감정을 끝까지 숨기고 진행된다. 이병헌이 보는 세상, 세상이 보는 이병헌,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까지.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어디까지가 진짜의 삶인지.
<싱글라이더>를 본 관객들은 하나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그 비밀은 호주의 비밀스런 삶에 대한 기러기아빠의 비애나, 워킹홀리데이 여학생의 일탈 같은 옐로우페이퍼 스토리가 아니다. 뒤늦게 삶의 여유와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길 떠난 남자의 회한이다.
이병헌은 눈물을 삼키고, 안소희는 살포시 웃으며 엄마를 기다릴 것이며, 강아지 치치는 여전히 꼬리를 흔든다. 그리고 공효진은 공항 화장실에서 흐느낀다. 타스마니아의 바다는 여전히 철썩거리고, 호주의 푸른 하늘에 하얀 비행기가 궤적을 그린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