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고령화가족], [고래],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등의 소설을 쓴 천명관 감독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 부산 출신의 작가 김언수의 소설 [뜨거운 피]를 영화로 옮겼다. 부산의 퇴락한 부둣가 구암을 배경으로 ‘쓰레기’, ‘양아치’, ‘건달’들이 영역싸움, 이권전쟁을 펼치는 느와르이다. 부산출신의 정우 배우가 이들 삼류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중간보스 희수를 연기한다. 개봉을 앞두고 정우를 (화상으로) 만나 영화에 대한 궁금증, 부산 출신 연기자의 회포를 물어보았다.
Q. 영화 본 소감이 어떤지.
▶정우: “이번 작품을 하며 중간 중간에 톤을 정리하기 위해 편집본을 몇 번 볼 수 있었다. 제작사 대표님이 성격이 급한 편이라서.(하하하) 저에게 살짝 보여주었고, 후시 녹음 톤 조정을 위해 볼 수 있었다. 큰 스크린으로는 언론시사회 때 처음 봤다. 완성판을 보면서 ‘아, 내가 저렇게 연기했구나’, ‘두 눈 벌겋게 해서 촬영을 했구나’ 연기하던 당시, 공간의 공기가 떠올라 객관적으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관객 분들은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매 씬 정성을 쏟았다. 좋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Q.코로나 때문에 개봉이 많이 밀렸다. 2년 정도 기다렸다 개봉한 심경은.
▶정우: “코로나 이야기를 계속하니 이 영화를 위해 고생하는 홍보팀에 미안하다. 그래서 그런 말은 자제하려고 한다. 시기를 떠나 극장에서 관객을 맞게 되었다. 설레기도 하고 긴장된다. 무엇보다 너무 반갑다.”
Q. 천명관 감독이 인터뷰에서 정우 배우가 부담감이 큰 것 같다며 쉬엄쉬엄하라고 말했다는데. ‘희수’ 캐릭터가 부담이 많았는지.
▶정우: “선배들 모시고 전체 리딩할 때 긴장을 많이 했다. 좋은 긴장감을 안고 촬영에 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촬영을 하면서 좀 깨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등바등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전체 분위기나 색깔에 맞춰 이끌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서는 선배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운을 받았다. 윤지혜 누나와의 호흡도 좋았다.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홍내 동생도 그 또래가 가지지 못한 패기, 넘치는 에너지를 가졌다. 후배들에게서도 긍정적 에너지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에너지가 잘 뭉쳐서 좋은 시너지를 낸 현장이었다. 부산에서 촬영을 하게 되면 작품의 성격에 따라 놀 듯이 찍기도 했다. 때로는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치열하게 준비하고, 열정을 갖고, 집중해서 찍어야하는 작품이었다. 근래 내가 한 작품 중 가장 큰 성장통을 안겨준 작품이다. 귀한 경험이었다.”
영화 '뜨거운 피'
Q. 천명관 감독은 부산사투리의 뉘앙스를 잘 몰라서 헤맸다고 한다. 부산 출신으로서 현장분위기는 어땠는지. 부산 사투리(비속어)로 ‘깔지마오’ 같은 대사가 나오기도 하더라.
▶정우: “천 감독님은 소설가로 유명하겠지만 감독으로서는 데뷔작이다 보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말로는 저에게 물 흐르는 대로 편하게 하자고 했지만 감독님 두통약 드시더라. 그만큼 정성을 쏟는 거죠. 감독도 배우들도 모두 매일매일 정성을 쏟았다. 그게 잘 담겼으면 좋겠다.”
“부산과 경상도 출신이 8할은 되었을 것 같다. ‘갈지마오’는 앞뒤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인 사람, ‘무대포’를 말한다. 오래 전에 영화 [친구]를 보면 ‘내가 니 시다바리가?’라는 대사가 유행이었을 때 흥미를 가졌다면 대사를 찾아보았을 것이다. 비속어, 사투리, 파생어 등 새로 접하는 단어이긴 하지만 뉘앙스라는 게 있다. 모르는 외국어라도 바디랭귀지로 어느 정도 뜻을 캐치할 수 있으니 관객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못 알아들었다면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요.”
Q 부산을 배경으로 한 누아르에 정우라는 조합이라면 너무 전형적이지 않을까.
▶정우: “작품을 할 때 내가 맡은 캐릭터는 그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시작한다. 느와르 장르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담는다. [뜨거운 피]도 영화적 설정이 들어가 있다. 희수가 사람 죽인다. 교도소에 가는 게 맞잖은가. 설정 자체가 그렇다. 조금은 허세를 부리는 인물이다. 어깨에 힘을 주고 폼 잡는. 그것은 그가 처한 환경에서 변모하는 과정에서 조금 쌓인 것 같다. 희수를 연기하면서 동물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으로서 이성과 본능, 그 사이를 오고가면서 점점 주위의 음모, 배신, 비리로 한 인간이 꼭꼭 억눌렸던 욕망이 폭발해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작위적이지 않게,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뜨거운 피'
Q. 아미를 연기한 이홍내 배우와의 뜻밖의 부자(?) 연기는 어땠는지.
▶정우: “[응답하다]에 나오면서 나 자신도 앳되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이런 설정이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최대한 나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수염도 기르고, 피부가 탁해 보이게 했다. 메이크업도 허름하게, 세안제도 안 쓰고. 옷도 허름하게. 이홍내와는 생각보다 잘 어울린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은 좀 그렇지만. 최근 홍내와 화보 촬영을 같이 했다. 언뜻 보면 친구처럼도 보일 것이다. 나이차 얼마 나지 않은 형 동생처럼.”
Q. 희수는 구암의 한 작은 호텔 매니저에서 점차 위로 올라가는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다.
▶정우:“뒤에 펼쳐질 상황을 염두에 두고 앞에 펼쳐지는 사건을 연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뒤에 뭐가 될지 모르니까. 후반부 인생에 대해 치밀하게 계산하지 않았다. 테이크마다 다르게 찍은 것 같다. 영화의 흐름에 맞게 편집할 수 있게 장면들을 준비한 것 같다. 후반부에 감정을 좀 더 끌어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사를 할 때 감정을 억누르며, 절제하는 느낌이 들게.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장르적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대사는 처음 이었던 것 같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Q. 희수를 연기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정우: “휴먼 장르를 몇 작품 했었다. [이웃사촌] 같이. 캐릭터의 감정은 에피소드가 늘어날수록 후반부 감정교류에 시너지가 생긴다. 그래서 그게 후반부에 감정이 터진다. 이 장르는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후반부를 위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처만 받는 것이다. 제가 오롯이 가져가야하는 게 있다. 그래서 연기를 하면서 슬픔과 아픔, 분노를 표현해 내기 위해 개인적인 아픔이나 기억들을 가져와서 투영하며 연기하기도 했다.”
정우
Q. 지승현 배우와 이홍내 배우에 대해.
▶정우: “지승현 배우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배우이다. '바람'과 '이웃사촌'이라는 작품을 함께 했다. 그래서 어색함이 없다. 부산에서 자라, 그 정서를 아는 배우라서 연기 하는 게 재미있었다. (이)홍내는 나이차가 나는 배우이다. 그런데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진지하고 훌륭했다. 그런 색깔을 느꼈다. 이런 배우가 모여서 함께 작품을 하면 좋은 장면, 좋은 작품이 생기지 않을까. 서로 응원하며 임했던 것 같다.“
Q. 정우 느와르 정서로 보자면 영화 [친구]가 하한선 같다. 혹시 [영웅본색] 같은 홍콩 느와르는 좋아하는지.
▶정우: “저도 [영웅본색] 세대 맞아요. ‘영웅본색’ 재밌게 봤고, ‘천장지구’도 재밌게 봤었다. 극장에서 봤는지 비디오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성치 영화도 그렇고. ‘도성’시리즈도 재밌게 봤었다. 그때는 홍콩영화가 우리나라에서 대유행이었다. 마치 지금 K드라마가 세계를 강타하는 것처럼. 홍콩영화도 향수를 느끼지만 우리영화 [친구]도 좋아했다. 제가 나고 자란 동네에서 촬영했었다. 부산에 ‘영화의 거리’가 있다. 최근 (TV조선) ‘허영만 백반기행’ 촬영 다녀왔다. 영화 [바람]도 찍었던 곳이다. [친구], [아저씨], [범죄와의 전쟁] 등. 감회가 새로웠다. 어릴 때 배우라는 직업을 꿈꾸면서 [달콤한 인생], [친구]를 봤었는데 이번에 그런 장소에서 내가 영화를 찍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하기도 한다. 어릴 때 생각해보면 신기한 경험들이 아직도 많다. 고향인 부산에서 자주 촬영을 한다. 향수에 젖어 분위기에 만끽할 수만은 없다. 이번 [뜨거운 피]에서는 연기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Q. 희수 캐릭터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외롭고 고독해진다. 그것을 연기한 배우는 어떨까. 후유증은 없었는지.
▶정우: “나는 매소드 연기를 할 생각도 없지만, 한다고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할 생각도 없지만. 그런데 이번 희수 캐릭터는 후유증이 있었다. 처음이었다. 너무 나 자신을 혹사시킨 것은 아닐까. 너무 잘 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래서 숙소에서 계속 대본만 본 것 같다. 혼자서 핸드폰으로 수백 번 찍으면 연기를 연습한 것 같다. 대사도 바꿔보며, 화도 내고, 웃기도 하며. 문득 오래 전 [돌려차기]가 생각났었다. 조연으로 출연했었는데 그 작품은 이슈가 되지도, 흥행작품도 아니다. 몇 회차 찍고 숙소에서 씻을 때 ‘헛헛함’이 오더라. 정성을 쏟았던 작품이다. 에너지가 고갈되었었다.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다.”
'뜨거운 피'
Q. 이번 작품에서 오래 여운이 남는 장면이나 대사가 있다면.
▶정우: “여러 대사들이 있다. 지금 드라마 [멘탈코치 제갈길](tvN)을 촬영하고 있어 정신이 없다. 희수가 오프닝씬에서 하는 대사가 있다. ‘무엇을 지키고 싶은가’ 묻는 질문에 희수가 ‘옛날에는 지키고 싶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하도 더럽게 살다보니 고만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이게 희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포스터에 쓰인 ‘세상은 멋진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떙땡한 놈이 이긴다'도 좋지만 나는 그 대사가 더 남는다.” (포스터에는 'XX한' 놈이 이긴다로 표기되어 있다)
Q. '뜨거운 피'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정우: “사람들이 이 영화에 나를 많이 추천했다고 하더라. 왜 그랬을까. 전형적인 영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글을 보니 굉장히 클래식한 영화를 한 편 보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 소설가 출신이어서 글 솜씨가 느껴졌다. 진의가 느껴졌다. 그 시나리오는 왜 끌리는지 설명은 못하겠다. 본능적으로 끌렸다. 시나리오가 동물적이다.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했다. 덧붙이자면 여태 느와르 장르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한번 잘 표현해 보고 싶었다. 제 나이도 이제 마흔이다. 한 인물의 서사를 그리는 작품에 도전하는 것도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Q. 정우 배우는 아까 말한 곱상하다거나, 동안이라는 평가와는 달리, 영화계 데뷔 초기에 출연한 작품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양아치3’, ‘부하7’, ‘양아치’, ‘동네 건달’ 같은 하류인생 단역이었다. 지금 돌이켜볼 때 그 시절 생각이 나는지. 그때 영화배우의 꿈은 어디까지였었나. 이번 작품에서 ‘정상은 허(虛)하다’는 대사도 나오더라.
'뜨거운 피'
▶정우: “스물 살 때 연기를 시작한 것 같다. 그때는 드라마든 영화든 가리지 않았다. 영화잡지 ‘씨네21’ 뒤편에 보면 오디션 공고가 있다. 그것보고 프로필 사진 들고 영화사 찾아가서 오디션 보았다.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 한 것이다. 어떤 배역이 되었든 간에. 그때 거칠어 보이는 캐릭터지만 지금의 희수가 가진 모습과는 전혀 톤이 다르다. 그때는 장르가 로코나 휴먼드라마였다. [뜨거운 피]는 처음해보면 느와르이다. 처음이다 보니 모든 게 새로운 것 같다. 사투리하거나 부산이 배경인 것 말고는 모두 새로웠다. 그리고 감독님이 제게 곱상한 외모라고 하셨는데 다른 배우가 들으며 웃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영화배우의 꿈은 지금도 꾸고 있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터널 속을 걷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저를 좋아해주시고, 알아주시는 작품도 있기에 빛을 받는 것이다. 럭키가이인 것 같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지금도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가치관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예전엔 꿈 하나만 보고 걸었다면 지금은 내 삶과 내 꿈을 풍요롭게 하는 게 무엇인가 생각한다. 건강한 꿈, 건강함 삶을 살고 싶다. 이 영화에서 희수가 그런다. 앞만 보며 달리다가 허하다고. 허상이라고. 내가 지금 그런 것 같다. ‘희수’만 보고 달려갔는데 끝나니 헛헛하다. 작품을 끝내고나니 희수를 조금 이해할 것 같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올라가려고 했는지.그 다음에 뭐가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철학저인 사람이 아닌데....”
Q. 개봉을 앞두고 관객에게 한 말씀.
▶정우: “시나리오가 날 것 같았다. 사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야기 자체는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을까. 설정이 영화적/작위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발이 땅에 닿아있는 것 같은 톤이 느껴진다. 그런 재미가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90년대, 1999년에 가졌을 법한 부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바닷바람을 맞는 것 같은 날 것의 영화이다. 극장에서 한 번 느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귀중한 시간 감사합니다. 화상인터뷰 첫타임에서는 적응이 안되었는데, 이번 타임은 그래도 좀 적응이 되네요. [뜨거운 피]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정우
[사진제공 = 키다리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