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앞으로의 5년을 이끌 20대 대통령선거가 끝났다. 선거 운동기간 후보와 진영 간에 펼쳐졌던 다이내믹한 열기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기고, 흥미로운 정치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현대사의 궤적에서 한국과 아주 흡사한 과정을 겪은, 그야말로 데칼꼬마니라고 할 수 있는 대만 정치판 이야기이다. 2004년, 대만 총통(대통령) 선거일 하루 전날 발생한 총격사건을 둘러싼 음모론이다. 티빙에 올라온 영화 ‘누가 총통을 쏘았나’(원제:幻術,2019)라는 영화이다. 흥미진진하다.
먼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대만현대사를 잠깐 알아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1910년 마지막 황제 푸이가 5천년 왕정시대를 끝장내고 대륙은 인민의 나라가 된다. 모택동(마오쩌뚱)의 중국공산당과 장개석(장카이스)의 국민당이 명운을 걸고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치른 뒤 대륙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차지하고, 장개석은 작은 섬 대만으로 내몰려 ‘중화민국’을 세운다. 대만을 차지한 장개석은 죽을 때까지 본토수복을 꿈꿨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장경국이 대만을 통치한다.
이 영화는 장경국(蔣經國, 1910~1988)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장경국 총통이 죽은 뒤 대만은 누가 다스리나. 국민당 지도부는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급하게 후계자를 내세운다. 이등휘(李登輝,리덩후이)였다. 당시 국민당 지도부는 대부분 대륙 출신이었다.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퇴하여 대만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절치부심 대륙수복의 원대한 꿈을 안고 있던 사람이다. 이등휘는 대만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인으로 ‘대동아전쟁’에서 열심히 싸운 인물이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했고, 일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인물이다.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라는 일본이름이 자연스러울만큼. 살벌한 국제정세 속에서 대만이 살아남으려면 일본을 믿고, 미국을 따라야한다고 굳게 믿는 인물이었다. 이등휘는 국민당 주석(主席,대표)이 되고, 총통(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그는 국민당 관료들과의 투쟁을 통해 ‘대만인의 대만총통’이 된다. 본토수복이라는 허황된(?) 꿈보단 국제정세 속에서의 대만인의 생존을 최우선시 한다. 그래서 장개석이 집권한 뒤 반백년 이어왔던 계엄령도 철폐하고, 이른바 대만 민주화를 착착 진행한다. 그 결정판은 총통선거였다. 국민당 손아귀가 아니라, 대만 민중의 손으로 자신들의 지도자를 직접 뽑는 것이었다. 2000년 선거에서 누가 당선되었을까? 국민당에서는 롄쩐이 후보로 나서고, 야당 민진당에서는 천수이볜(陳水扁)이 나선다. 이때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송추위(宋楚瑜)였다. 송초유는 원래 이등휘가 키운 국민당의 엘리트였다. 요직을 거치며 차곡차곡 내일의 지도자가 될 것 같았지만 이등휘는 그의 야심에 의문을 품는다. 송초유는 국민당을 박차고 무소속으로 대선에 나선다. 그런데, 선거 막바지에 대형 스캔들이 터진다. 송초유의 금융부패 스캔들이 터지고 송초유는 주저앉고 만다. 과연 누가 송의 스캔들을 언론에 제공했을까? 영화에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다. ‘제임스 릴리’. 그는 외교관계가 없는 대만에 ‘미국대표처’ 대표로 있으면서 이등휘와 휴먼 네트워크를 갖고 있던 인물이다. CIA출신이었던 그는 이등휘에게 고급 정보를 제공하고, 그의 정치적 성장에 큰 힘을 발휘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제임스 릴리(미국)가 우려한 것은 대만에 급진적 통일론자가 집권하여 중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는 것이었다. 그를 막기 위해서는 현상유지, 혹은 평화주의자가 계속 집권해야하는 것이었다!
이등휘는 2000년 대선에서 송초유를 내침으로써 국민당 후보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야당후보 민진당(천수이볜)을 결과론적으로 지지한 셈이 된다. 그런데, 4년 뒤. 다시 대선이 다가오면서 풍파가 인다. 천수이볜은 재임기간 부정부패로 얼룩졌다. 재선에 나섰지만 여론은 최악이었다. 천수이볜은 ‘다시’ 이등휘에게 손을 내민다. 이등휘는 정치판에서 떠났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아마, 김종인 정도의 역할?) 이등휘가 완전히 기운 선거판에서 천수이볜을 살릴 묘안이 있을까?
영화 ‘누가 총통을 쏘았나’는 2004년 3월 19일, 대만 남부도시 ‘타이난’에 발생한 총격사건을 둘러싼 음모론을 다룬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천수이볜은 선거운동 마지막 날 자신의 고향 타이난에서 유세를 펼친다. 무개차에서 올라타 유권자에게 손을 흔들 때 어디서 총성이 울린다. 두 발! 그중 하나가 그의 복부를 스친다. 병원에 실려 가고, 천수이볜의 당선을 저지하려는 중국의 암살음모 이야기가 나돈다. 결국, 다음날 선거에서 천수이볜은 3만표 차(0.23%)라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재선에 성공한다. 물론 이날 총격전은 끊임없이 ’자작극‘ 논란에 휩싸인다. 아무도 그를 암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는 총알을 맞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총을 쏜 사람은 잡혔고, 재판도 받기 전에 감옥에서 자살하면서 영구미제 사건이 되고 만다.
영화 ‘누가 총통을 쏘았나’는 바로 이 실제 사건에 음모론적 상상력을 더한 것이다. 천수이볜이 이등휘에게 선거를 부탁했고, 이등휘는 심복에게 책을 하나 주며 대책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심복은 마치 오즈왈드를 이용해서 케네디를 쏘았듯이 타이난에서 사제총을 쏜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안전판을 하나 세운다. “319총격사건은 대만역사상 중요한 공적 문제이다. 이 영화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영화는 대만현대사를 이등휘라는 정치인을 통해 흥미롭게 압축 소개한다. 그리고 국민당이나 민진당 등 대만 정당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천수이볜은 연임에 성공하지만, 끝은 좋지 못했다. 마영구(馬英九,마잉쥬)가 총통에 당선되고 그는 부패혐의로 감옥행. 영화를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천수이볜이 마지막 유세를 펼칠 때 이등휘는 [대부]의 돈 꼬를레오네처럼 정원에서 손자들과 함께 인형극을 보고 있다. 그의 옆에는 비서쯤 되는 여자가 앉아있다. 대륙위(중국과의 협상을 담당하고 있는 대만 관공서, 우리나라의 통일부 정도에 해당함)의 채영문(차이잉원)이다. 지금 대만의 총통이다.
‘누가 총통을 쏘았나’는 대만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보아야할 작품이다. (누가 대만의 이런 자잘한 정쟁사에 관심을 기울일지 의문이지만.)
영화는 이등휘가 일본의 한 지인과 영상통화를 하며 책을 소개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책은 영화 마지막에 다시 등장한다. 이등휘, 혹은 이등휘 캠프의 누군가가 읽고 영감을 떠올려 ‘천수이벤의 자작극’을 꾸몄다는 것이다. 그 책은 도노모 로(伴野郞)라는 작가의 ‘다윗의 밀사’(원제:ダヴィデの 密使)라는 소설이다. 정말 그런 책이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있다. 2001년 출간된 이 소설은 런던에서 이스라엘 고위관료가 암살되면서 펼쳐지는 국제정치음모론이다. 범인은 티베트-팔레스타인의 혼혈 킬러. 이스라엘 모사드는 킬러의 다음 암살목표가 대만 총통선거에 나선 야당 후보자임을 파악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요원을 급파한단다. 동과 서를 넘나드는 음모론인데 아마 여기서 ‘암살 자작극’이 나오는 모양. ‘도노모 로’ 작가가 궁금해서 더 찾아보니 이 사람은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이란다. 그가 쓴 소설 'K 파일38'도 흥미롭다. 배경은 한국전쟁이다. 일본 재벌이 미국 정계와 작당하여 한국전쟁을 일으킨다는 내용이란다. (미국)대통령이 되려는 정치인과 (2차대전) 패전국 일본의 야심이 결합된 내용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흥미롭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더! 제임스 릴리는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중국어에 유창하다. CIA에서 30년간 근무했고, 1981년부터 4년간 미국재대만협회 사무소장(주 타이완 공관장)을 1986년부터 주한미국대사를 지냈다. 천안문사건이 일어나던 1989년엔 주중 미국대사였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이 사람의 중국이름이다. 이결명(李潔明), ‘리지에밍’이다. ‘총통은 누가 쏘았나’는 티빙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