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는 ‘단편야화(夜話)전’이라는 타이틀로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영화’ 세 편을 연속 방영한다. 김의석 감독의 <오명>, 박우건 감독의 <서스피션>, 이준섭 감독의 <칠흑>을 만날 수 있다. 겨울 한밤에 만끽할 수 있는 신선한 작품들이다.
이중 러닝타임 25분의 단편 [서스피션]은 남편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의심하는 만삭의 여인의 심리를 묘사한 작품이다. 남편을 믿고 싶어하는 마음과 여러 정황상 범인이 확실해 보이기에 불안해 하는 아내. 게다가 아내는 곧 출산을 앞둔 만삭의 몸이기에 여러모로 불안하다. 감독은 짧은 시간동안 꽉 짜인 이야기를 조용하게, 흠잡을 데 없이 긴장감을 유지해 간다.
영화의 첫 장면은 집주인(할아버지)이 찾아와 만삭의 지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어 퇴근한 남편과 함께 집 보증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전세금을 안 올릴 것이라는 약속과는 달리 대폭 올려받아야겠다는 주인. 지원이 화를 내자 남편은 술이나 한잔 하자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날밤 과음한 상태로 돌아온 남편. 그리고, 집주인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경찰이 찾아오고, 남편이 범인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시작된다. 남편은 변함없이 친근하고, 그럴수록 아내는 괴로워진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41년도 작품 <서스피션>이 떠오른다. 히치콕 감독은 그 전해에 <레베카>라는 걸작 스릴러를 찍었다. 히치콕 감독이 조안 폰테인을 데리고 다시 한 번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를 내놓았다. 조안 폰테인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잘 생기고, 말 잘하는, 메너 좋은 남자(케리 그랜트!)에 매료되고 덜컥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사업을 한다는 남자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고, 남편이 자신을 ‘증거가 남지 않는’ 독극물을 탄 우유를 마시게 해서 죽일 것이는 합리적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될까.
박우건 감독은 히치콕의 <서스피션>의 제목뿐만 아니라 상황을 가져온다. 아내가 남편을 의심한다는 것. 영화의 묘미는 남편이 정말 죄가 있는지 없는지 의심이 켜켜이 쌓이고, 아내는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한다는 불안감이다. 히치콕은 아내의 목숨도 위험할지 모른다는 상황으로 몰고 있고, 박우건 감독은 아내가 만삭이라는 특수성을 담보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어쩌면 히치콕의 또 다른 스릴러 <가스등>처럼, 아내의 망상으로 몰고 가려는 음모가 임산부의 심리스릴러로 에스컬레이팅될 수 있다.
박우건 감독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한 여성의 일상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과연 남편은 아무 죄도 짓지 않았을까. 아내는 순간 할까. 25분동안 그 이야기를 한다. 아내 지원을 연기한 배우 박가영은 어제 개봉된 독립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에서 세상이 싫어 죽으러 태백으로 향하는 여주인공을 연기했다. 그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도 뇌리에 남을 독특한 목소리로 극의 텐션을 높인다.
오늘 KBS독립영화관은 ‘베이징 동계올림픽’(하이라이트 방송) 때문에 아주 늦은 시각에 시청자를 찾아간다. 기다리면 좋은 한국의 독립영화를 만날 수 있다.
▷서스피션(2020년) ▷감독/각본/제작/편집:박우건 ▷출연:박가영, 황상경, 임형태, 임호준 촬영:최영기 ▷상영시간:25분
■■인터뷰■■ 박우건 감독, ‘서스피션’에 대해 궁금한 것들
Q. <서스피션>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했다.
▷박우건 감독: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의심해야하는 상황을 그려보고 싶었다. 영화의 제목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서스피션’(1941)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남편을 의심한다는 부분에서는 히치콕 영화와 분명 비슷한 면이 있지만, 이 작품은 아내를 해칠 수도 있다는 위협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남편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의혹 자체가 결국 만삭의 부인에게는 부담과 또 다른 종류의 위협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Q. 최근 치솟는 집값으로 전세보증금에 관련된 문제가 있다. 부부와 집주인의 전사를 들려주신다면.
▷박우건 감독: “신혼부부는 그간 모아온 재산으로 전셋집을 구하려 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적당한 집을 발견한 부부는 계약을 하면서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리지 않겠다는 말에 안심했다. 집주인도 진심으로 그렇게 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바뀌고 원하는 것도 바뀔 수 있다.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라기보다, 원하는 것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그 변화가 갈등을 빚게 될 수 있다는 점에 무게를 두고 싶었다.”
Q. 부부로 출연한 배우 박가영과 황상경의 캐스팅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박우건 감독: “두 배우 모두 필름메이커스 사이트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일단 박가영 배우는 제가 상상한 아내 ‘지원’의 역할에 잘 어울렸다. 박가영 배우는 주어진 상황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굉장히 잘 파악하고 동시에 충실하게 표현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서스피션>은 아내보다 남편의 이미지가 먼저 잡힌 작품이다. 건장한 외향과 부드러운 모습을 지녔지만, 간혹 그 이면에 섬뜩한 모습이 있는 남편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뚜렷한 이미지 때문에 배우 물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황상경 배우를 동료 감독 중에 한 분이 추천을 해줘서 바로 연락을 드렸고 캐스팅했다.”
Q. 아내 지원은 남편 중기가 범인일지 모르는 사건 현장을 지나가게 된다.
▷박우건 감독: “지원은 산책 도중 사건현장을 지나친다. 직후 남편이 형사들과 조사를 받으러 가게 되면서 지원은 홀로 오랜 시간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된다. 여러 상황들에 대해 상상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돌아온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음에도 남편에게 그 이상의 확인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남편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한 말들이 진짜라고 믿고 싶고, 그것을 확인해서 안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확신하려고 할수록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Q. ‘의심’의 여지를 주기 위해, 시나리오에서 많은 부분을 고민했을 것 같다.
▷박우건 감독: “의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했던 점은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충분한 개연성을 유지해야하는 것이다. 남편 중기가 살인을 했어도, 하지 않았어도 말이 되어야하는 상황을 만드는데 신경을 썼다. 그리고 사건 자체가 특정한 실제 사건과 연결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관객이 사건의 진실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이며, 남편 스스로도 자신이 살인자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워야 했다.”
Q. 주인집 아들이 찾아왔을 때가 아내 지원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박우건 감독: “집주인 아들은 이미 중기가 살인범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찾아온다. 감정적으로 당사자들을 직접 찾아와 압박을 한 것이다. 이에 지원도 남편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을 알게 된다. 집주인이 보증금으로 지원을 압박한 것처럼, 아들 또한 지원을 압박한다. 이 때문에 지원은 남편에 대한 의심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고 고통스러워한다.”
Q. <서스피션>을 연출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박우건 감독: “전작 <미나>, <노팅>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스스로 설정한 연출적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역동성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의 모습에서 불안감과 공포감을 살리는데 집중했다. 잔인한 장면과 폭력이 부재한 현실적인 일상에서 극을 진행하는 것이 이번 <서스피션>의 중요한 연출 포인트였다.”
Q. <서스피션> 이후 근황을 전해주신다면.
▷박우건 감독: “<서스피션>은 의심에 관한 영화이다. 분명한 감정들로 채워진 관계 안에서도 크고 작은 의심이 일어날 수 있다. <서스피션>은 그것에 관한 짧은 영화이다. ‘서스피션’ 이후 개인적인 많은 변화를 겪으며 다음 작품 준비가 여의치 않았다. 현재는 장편영화를 연출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죽음과 복수’는 오랫동안 제게 중요한 키워드였으며, 다음 작품에는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이 파고 들려고 한다.”
** 박우건 감독과의 인터뷰는 KBS 독립영화관 송치화 작가와의 서면인터뷰로 진행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