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가을, 코로나 사태 속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독립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가 드디어 개봉된다. 무슨 일인지 세상사는 것이 지옥 같은 남자 김모인(강길우)과 여자 류화림(박가영)이 함께 태백으로 죽음의 동행을 떠나는 우울한 작품이다. 광고 일을 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닷새 만에 촬영을 끝냈다는 김지석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코로나시국의 자살동행극’이라니. 그런데, 영화는 무거운 듯 가볍고, 우울한 듯 흥미롭다. 배우의 말에 이어 감독의 말을 직접 들어보았다. 서울시내 한복판에 있는 스타박스에서 만났다.
Q. <온 세상이 하얗다>가 개봉한다. 완성된 작품을 몇 번이나 본 것 같은가.
▷김지석 감독: “수도 없이 봤다. 광고 일을 하다 보니 틀린 부분이 있으면 안 되니까 반복해서 봐야한다는 강박이 있는 모양이다.”
Q. 영화 시작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남북이 통일된다는 내용이다. 그런 내용이 계속 나오는데, 뭔가 글로벌한 빅뉴스를 배경으로 삼으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왜 ‘통일’인가.
▷김지석 감독: “왜 그랬을까. 그건 생각을 안 해 봤다. 꼭 ‘통일’이 아니어도 막연하게 사회에서 주목을 받을 큰 사건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외계인이 나타났다 해도 되는. 영화 속 시간적 배경은 2023년이다. 그런 것을 가상으로 해 보았다.”
Q. 중간에 다시 등장하는 통일뉴스에서 남북의 정상 이름이 나오는데 조금 놀랐다.
▷김지석 감독: “3년 전에 찍었고, 시나리오는 더 이전에 썼던 것이다. 이런저런 이름 조합해서 쓴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오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 그 대사는 정치적 의도보다는 위트
Q. 그럼, 박가영 배우가 연기한 류화림이 극중에서 내뱉는 충격적 대사는?
▷김지석 감독: “영화 찍을 때는 코로나가 완전 초기단계였다. 금세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코로나) 때문에 미워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부분에서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것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늘상 있어왔던 일이다. 미국이 되었든 중국이 되었든. 예전의 영국이 되었든 말이다. 그런 걸 언급하고 싶었다. 영화 찍을 당시에는 홍콩시위가 뉴스를 장식할 때였다. 그리고 동남아 배낭여행을 다니다가 티베트 승려들의 분신 이야기를 듣고 인터넷을 찾아봤었다. 강대국이 약자를 대하는 태도. 그 당시, 그런 모습에서 그렇게 인식되었던 것 같다. 목적을 갖고 의도한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극중 (우울한) 분위기를 조금 환기시킬 수 있을 것 같은 말이다. 엉뚱한 말. 그렇게 중요한 날에 (내뱉을) 중요한 말 같지도 않다. 위트라고 생각한다.”
Q. 휴게소에서 강도를 만난다는 것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촬영하다가 현장에서 끼워 넣은 에피소드 같은 것인가.
▷김지석 감독: “로케이션을 돌다 추가한 신이 있기는 하다. 휴게소 다음에 나오는 모인이 글을 쓰는 장면, 화림이 소주병 들고 제방을 걸어가는 장면은 그런 과정에서 추가된 것이다. 휴게소 이야기는 두 사람의 여정에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사람들이 좀 더 나쁘게 나왔으면 어땠을까 생각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가 있듯이 어떤 경우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악의란 것이 있다. 어수룩하게 나오지만, 그 사람들이 진짜 돈을 보고 다가선 것은 맞다. 그래서 화림이 ‘뒤져!’라고 말하는 것이다.”
Q. 그 다음 장면은 누군가가 ‘음주운전’을 신고한다.
▷김지석 감독: “술을 마시고 운전하면 안 되니. 재밌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들이 도망가는 모습에서 소소한 재미를 주려고 했다.”
Q. 두 사람이 신당(법당, 점집)에 들어갔다가 법사에게 쫓겨나는 장면. 쌀알로 점을 보는 장면(米占)에 대해 설명을 좀 해 주신다면.
▷김지석 감독: “촬영 장소를 찾다가 신당 장면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 군데가 있었는데 법사님이 허락을 해주셔서 저녁에 찍을 수 있었다. 법사님이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다. 두 사람이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얼굴을 돌리는 장면을 찍었다. 그런데 NG가 계속 났다. 연기를 안 해 보셨으니. 그런데 탁자에 쌀알이 흐트러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면 이래저래 하셨다. 그런 식으로 그 장면 나왔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박가영 배우는 이 장면에 대해 “법사님 장면은 따로 촬영한 것이다. 우리도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섬뜩했다. 아마도 둘의 앞으로의 행적을 암시하는 것인 모양이다. 우리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걸 느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Q. 그럼, 이 영화 마지막은 어떻게 되나. 죽느냐 사느냐.
▷김지석 감독: “그 질문을 많이 받았다. 두 사람은 그런 생각이었다. 남자는 죽을 결심이 너무나 확실했다. 예전에 이미 죽었을 사람이지만 보류되었다가 태백까지 온 것이다. 그에 비해 여자의 경우는 애매하다. 전사(前史)가 확실히 없고, 남자를 따라온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완성된 영화를 다시 보니 조금 더 감정이입이 되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못 죽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더라. 엔딩 크레디트 음악에 묻혔지만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난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그런 소리. 산속 더 깊이 들어갈 수도 있고, 그냥 산을 내려올 수도 있다. 지금 심정으로는 7대 3이나, 6:4정도일 것 같다. (영화를 자꾸 보니)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들이 살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Q. 준비 중인 다음 작품은 있는지.
▷김지석 감독: “작년부터 준비하는 게 있다. 올해 초 초고가 나왔다. 완전 상업영화이다. 주위 분에게 피드백을 받고 수정 중이다. 5월이나 6월에는 어느 정도 나올 것 같다. 여전히 상업적 영화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피드백 받고 있다.”
Q. 광고 일을 했는데 상업적 감각이 부족하다니...
▷김지석 감독: “그러게요. 광고 일을 하면서 나 자신이 호흡이 느리고, 말이 많은 것 같다. 광고는 이미지가 중요한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공부하고 있다.”
Q. 독립영화를 이제 한 작품 만들었다. 다음 작품 만드는 과정이 쉽지는 않겠다.
▷김지석 감독: “이 영화 찍을 때도 영화 쪽 커리어를 갖고 시작한 게 아니다. 각종 지원 제도에 대해 많이 알아보지도 못했다. 무조건 빨리 찍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상업영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투자 플로어를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 시나리오 잘 써서 투자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Q. 상업영화라 하면, OTT쪽도 염두에 두고 있는지.
▷김지석 감독: “요즘에는 많이 하잖아요. 매체의 특성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다. 어떻게든 영상 관련 일을 하고 싶다. OTT 오리지널 시리즈도 가능하다.”
Q. 아무리 저예산 독립영화라 해도 5일 만에 찍을 수 있는가?
▷김지석 감독: “그것도 잘 몰라서 그랬다. 호기롭게 말이다. 독립영화여서 여건이 열악하지만 그렇다고 배우나 스태프에게 그런 압박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야간 촬영장면이 없었다. 해 뜨면 찍고 해 지면 접는다. 서울 장면에서는 밤 신이 있다. 5회차 촬영이 가능했던 것은 3년 동안 광고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감독으로 바쁘게 스케줄 잡고, 동선 짜고 컷 짜는 것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하면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테이크도 효율적이었고, 배우들이 연기도 잘 해주었다. 최대한 줄여 촬영한 것도 있다.”
Q.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이 있다면.
▷김지석 감독: “아무래도 마지막 장면. 자살 하려는 사람을 구해주고 나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사가 중요했다. 그 때 박가영 배우의 목소리가 잠겼다. 따뜻한 물도 마셔야했고, 그 장면에서 애를 많이 먹었다. 다음 장면 몽타주 신도 찍어야했다. 그 부분 정말 공들여 찍었다.”
Q. 그런데 왜 김모인은 술에 의존하고 자살하려고 하나. 정말 누군가를 죽인 죄책감이라도 있는가.
▷김지석 감독: “설정한 것은 대략 이런 식이었다. 모인에게는 집안 내력이 있을 것이다. 어머니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할아버지가 광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난다. 음울한 기운의 집안에서 태어난 모인은 어렸을 적 유복하게 살았지만 커서는 일도 하지 않고, 재산을 축냈을 것이다. 공부는 많이 했지만 술에 빠져 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 그 죄책감으로 그런 것 같지만, 어떤 징후 정도로 생각한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벌이지도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설정이다.”
(영화에서 추론할 수 있는 모인은 병원에 오래 있었고, 기초생활수급자이며, 언젠가 비닐하우스에 불을 내기도 했다. 기관에서 도움을 받고 있으며, 수녀원 같은데서 수시로 챙겨주는 그런 사람이다.)
Q. 그럼 여자 류화림은 왜 그런 삶을 살고 있나.
▷김지석 감독: “모인에 비해 화림의 전사는 덜 나타난다. 대신 대사로 짐작할 수는 있다. 캐릭터는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의 극단적인 모습을 뭉쳐놓은 것이다. 화림은 알코올과 떼어놓을 수 없는 우울한 감정이 지배한다. 아마도 술집에서 일했고,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과 연인이었을 것이다. 어딜 가나 자신의 이름을 바꿔 말하고,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10년 이상을 떠돌면서 사니 공허감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스스로는 평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내부에서는 눈물이 쏟아지는, 무언가가 가득 차 있는 인물이다. 하필 그 즈음에 남자가 칼을 들고 들이닥친다. 약도 계속 먹고, 기르던 고양이도 얼마 전에 죽고, 딱 그 지점.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 김모인을 만나게 된다.”
Q. 엔딩 크레디트 올라갈 때 그림이 나온다.
▷김지석 감독: “동양화 그리는 형님이 그려준 것이다. 그 그림은 부산국제영화제때 포스터에서도 사용했었다. 임철민 작가이다.”
Q. 광고 일을 하다가 감독이 되었다. 원래 꿈이 영상 쪽이었나.
▷김지석 감독:“영화에 대한 꿈은 늦게 가졌다. 20대 중후반쯤. 처음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학교 들어가서는 영화 보는 게 취미였다. 도서관 영상자료실에서 하루 종일 헤드셋 끼고 영화를 봤던 것 같다. 모르는 게 많았다. 좋아하는 감독도 생기고. 좋아하는 작품. 취향도 생기더라. 물론 영화관련 일을 하면 멋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광고일은 카피라이터로 일했었다. 야근이 잦았다. 영상 제작보다는 광고주 PT하고, 협상하는 일을 하다가 제작 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형태의 광고를 만들고 그랬다.”
Q. 이 영화 만들기 전에 단편 작업은 얼마나 해 봤는지.
▷김지석 감독: “‘김해달별’이란 단편을 처음 만들어보았다. 사람이름이다. 광고회사에는 일하는 카피라이터. 내가 쓴 시 제목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내레이션으로 영상화 작업을 했다. 이야기 반, 영상 반. 처음 만들어본 것이다. 그리고 [장날]이라는 단편을 찍었다. 물론, 영화제 같은데 출품되거나, 초청되지는 못했다.”
Q. 시를 썼다. 신춘문예에도 많이 도전했겠다.
▷김지석 감독: “시는 학교 다닐 때부터 썼다. 직장생활하면서도 매년 도전했다. 난 마흔까지 그럴 줄 알았다. 이젠 안하죠. 핑계라면 시나리오를 열심히 쓰고, 광고를 열심히 하다 보니 잘 안되더라.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문예지에도 많이 응모해 보았다. 본심에 오른 적은 있지만 당선된 적은 없다. 그러니 등단 시인은 아니다.”
Q. 영화 제목 <온 세상이 하얗다>는 시인의 마음으로 지은 것인가?
▷김지석 감독: “처음 가제는 <태백>으로 지었었다. 그 후 몇 가지 더 생각해 봤었다. ‘태백으로 가는 길’, ‘길 위에서’ 같은. ‘숲으로’, ‘태백 숲으로’ 이런 것도 막 떠올랐다. 그러다가 태백시(市)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뜻풀이가 ‘온 세상이 하얗다’는 게 있었다. 예뻤다. 생각해보니 내 영화 제목으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렇게 지은 것이다.”
Q. 코로나가 다시 극성을 부리는 가운데 극장 개봉된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김지석 감독: “정말 이게 스크린에 걸리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찍을 때는 너무 멀리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배우와 스태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부산영화제에 간 것도, 배급이 성사된 것도. 좋은 점을 봐주신 것 같아 너무 감사하다.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 그게 다시 원동력이 될 것 같다. 소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세상엔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강길우, 박가영이 주연을 맡은 김지석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온 세상이 하얗다>는 오늘(10일) 개봉한다.
[사진제공=트리플픽처스, 평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