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를 ‘중국입장’에서 약술하면 이렇다. 1949년 모택동이 천안문광장에서 ‘5천년의 폐악’을 일거에 뒤집고 인민의 나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을 선포한다. 그런데, 나라가 틀을 잡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미 제국주의’가 중국을 집어삼킬까 전전긍긍한다. 전쟁이 끝나자, 이번엔 자연재해가 이어지고 수백만이 굶어죽는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공산국가 중국이 생존할 길은 암담하다. 모택동은 홍위병을 앞세워 문화대혁명을 일으킨다. 전혀 문화적이지 않았던 인성말살의 10년동란(十年動亂)이 이어진다. 그리고 1976년, 모택동이 죽고 4인방이 몰락한다. 이 때 등소평이 전면에 등장하며 ‘돈이면 최고’인 현대중국이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10년간 문을 닫았던 대학도 다시 열리고, 신입생을 다시 뽑기 시작한다. 섬서(샨시)성 촌 동네의 장예모 학생이 북경전영학원(베이징필름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장예모는 나이가 많아 ‘감독과’는 못 들어가고 ‘촬영과’에 입학한다. 그 장예모 감독의 신작이 공개된다. <원 세컨드>(원제:一秒鐘)라는 작품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장예모 영화인생 최고의 작품이다!
[원 세컨드]의 첫 장면은 황량한 사막지역을 허겁지겁 뛰어오는 남자를 보여준다. 아마도 섬서성보다 더 서쪽지역인 것 같다. 밤늦게 동네 마을회관에 도착한 남자는 “영화상영이 끝났나요? 뉴스(新聞簡報)도 같이 틀어줬나요?”라고 묻는다. 그 시절에는 산골/오지마을에 영화가 그런 식으로 상영되었다. ([시네마천국]에서 필름통을 실어 나르는 것처럼) 필름이 이 마을 저 마을로 전해지며 ‘은막에서 영롱한 세상이야기’가 라오바이싱(老百姓)에게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본 영화와 함께 ‘신원지엔빠오’라고 이전에 우리나라 ‘대한뉴스’같은 국책영화가 상영되었다.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엔 그런 영상을 보며 ‘천안문소식도, 이웃동네 소식도, 모 주석 근황’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이 마을회관을 찾았고, ‘신원지엔빠오’에 관심을 가졌을까? 자신의 딸이 뉴스에 나왔단다. 이 남자는 누구이며, 딸하고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영화는 ‘문혁’과 ‘시네마천국’과 ‘사람’의 이야기를 눈물겹게 전해준다.
이 영화는 2019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가 막판에 ‘기술적인 문제’로 철회된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다. ‘중국당국’ 혹은 ‘제작사’가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는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중국정부에게 불리하거나, 국가 이미지를 심히 훼손시킬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1년 뒤 열린 중국 금계(金鷄獎)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가 또 한번 ‘기술적인 문제’로 상영이 취소된다. 그런데 곧바로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사실, 영화에서 ‘중국정부에게 불리하거나, 중국 이미지를 훼손시킬 여지’는 거의 없다. 옛날엔 그렇게 살았고, ‘문혁’이란 건 미친 짓이었다는 건 비밀도 아니니까.
**스포일러 주의**
영화에서 남자(張譯,장이)가 ‘신원지엔빠오’에 매달리는 것은 자기 딸이 화면에 나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노동개조’ 중이었다. 문혁당시 반혁명분자는 마치 감옥 같은 곳에 수용하여 정신교육을 시켰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그곳에 갇혔는지 모른다. 그는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탈출하여, 사막을 가로질러 마을회관까지 온 것이다. 10분도 안 되는 ‘뉴스화면’에서 딸의 모습은 딱 ‘1초’ 등장한다.(영화 제목으로 쓰인 ‘원 세컨드’) 트럭에서 양곡포대를 받아 옮기는 모습이다. 남자는 그 장면을 수십 번 돌려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아마도 그 딸은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하게 한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영이 취소되었을 때 영화 시놉시스에서는 이 남자의 이름과 딸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언급되었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벌써부터 ‘무삭제판, 원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장예모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딸의 이야기가 나온다. 원래는 양곡포대를 옮길 때 트럭이 움직여 죽는다는 것이다. 감독은 그런 이야기를 화면에 다 담는 것보다는 ‘1초의 편집’을 선택한 것이다. 남자(아버지)의 대사 중에도 “겨우 14살이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남아있다. 이 영화가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그 수없이 반복되는 ‘1초영상’의 앞뒤 화면의 힘 때문일 것이다.
● ‘영웅아녀’와 ‘원 세컨드’
또 하나, [원 세컨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을회관에서 상영되는 본 영화이다. 그날 마을사람들이 관람하는 영화는 1964년 작품 [영웅아녀](英雄兒女,영웅의 아들과 딸)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중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물론, 중국사람 입장에서!)이다. [피아골]이나 [태극기 휘날리며]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영웅아녀]는 한국에서 전쟁이 나자, 중국이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명분으로 인민지원군을 보낸다. 그때 전선에 투입된 ‘중국군인’의 눈부신 활약이 핵심이다. 왕청은 고지전에서 장렬하게 산화한다. 오빠와 함께 문선대의 일원으로 전장에 온 동생 왕팡이 뒷이야기를 이끌고 간다. 중국인이라면 ‘영웅아녀’에 등장하는 왕팡과 고위인사(정치위원)의 관계를 잘 안다. 알고 보니 친부-친딸이었던 것이다. [영웅아녀] 마지막 장면에 딸과 아버지가 상봉의 기쁨에 눈물을 마구 흘린다. [원 세컨드]에서는 남자주인공(장이)과 여자주인공(류하오춘)이 묶인 채 마을회관에서 그 장면을 함께 본다. 아마도 ’영웅아녀‘를 봤다면 이야기꾼 장예모 감독의 이야기 방식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원 세컨드’에 나오는 ‘영웅아녀’는 한국전쟁의 중국 측 입장을 전하려는 수단이 아니다. 그 시절, 그 마을에서 그 남자와 그 남자의 딸의 이야기를 백 배, 천 배 깊게 이해시키려는 방식인 것이다.
장예모의 [원 세컨드]는 영화를 사랑한다면 ‘시네마천국’일 것이며, 중국현대사를 공부한다면 ‘걸작’일 것이며, 사람의 정을 이해한다면 ’내 인생의 영화‘가 될 것이다. 참, 이 영화는 작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원 세컨드 一秒鐘/One Second ▶감독:장예모(장이머우) 출연:장역(장이), 류호존(류하오춘), 범위(판웨이) ▶2022년 1월 27일 개봉/ 12세관람가 /103분 #영화리뷰 #박재환 KBS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