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남
TV탤런트이자 영화배우 장영남은 원래 연극배우이기도 하다.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인 장영남은 1995년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그를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연극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황정민이 주연을 맡은, 셰익스피어 시대극 ‘리차드 3세’이다. 피와 야망으로 얼룩진 왕좌를 차지하고 마는 노회한 ‘리차드 3세’와 각을 세우는 선왕의 비, 엘리자베스 역이다. 11일 개막을 앞두고 장영남 배우를 만나 오랜만에 무대에 오르는 소감을 들어보았다.
연극 ‘리차드 3세’는 영국 역사를 바탕으로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이다. 1483년, 에드워드4세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이 에드워드 5세로 즉위하지만 재위기간은 두 달 남짓. 에드워드4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이 조카(에드워드5세)를 런던탑에 감금시키고 ‘리차드3세’로 즉위한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리는 에드워드4세의 비(妃)이자, 에드워드5세의 엄마인 엘리자베스를 장영남이 연기한다.
- 2018년 상연된 [엘렉트라] 이후 4년만이다. 소감부터.
▶장영남: “다시 무대에 서는 것을 갈망해왔다. 마음은 있는데 매체 작업이 이어지다 보니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이왕 무대에 오를 것이면 드라마와 병행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미루다가 이번에 조금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제작사 대표 전화를 받았고, 연이 닿아 참여하게 되었다.”
장영남
- 이전엔 [리차드 3세]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그 때는 ‘앤’ 역이었고 이번엔 ‘엘리자베스’ 왕비이다.
▶장영남: “오래 전에 출연했었다. 그땐 앤을 연기할 만큼 어렸었다.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애도 있고. 같은 작품에서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제게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 세익스피어 시대극은 대사가 엄청나게 많다. 엘리자베스의 대사는 다른 작품에 비해 어느 정도인지. 대사를 완벽하게 암기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지.
▶장영남: “대사가 진짜 많다. 이렇게 긴 것을 어떻게 다 외냐고 그랬다. 각색을 많이 해주셨다. 대사 분량에 있어서 주인공인 황정민 선배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엘리자베스의 대사는 많은 양이 아니다. 암기법은 자연스레 몸에 밴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도 암기과목을 잘 했다. 연출 선생님이 5분 전에 대사를 건네줘도 다 욀 정도로 암기력이 좋았다. 물론 지금은 많이 떨어진다. 반복적으로 대본을 볼 수밖에. 예전보다 대본 들고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 같다.”
- 이번에 엘리자베스를 연기하는데 필요한 감정은 어떤 것인지. 준비는 어떻게?
▶장영남: “연출님이 엘리자베스에게 담고 싶은 게 ‘엄마’라고 했다. 사실 극중 엘리자베스는 결혼을 한 번 한 것도 아니고, 또 남편(에드워드 4세)이 죽자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한다. 그런데 황정민(글로스터 공작)이 왕권을 뺏기 위해 황태자를 제거한다. 생존력이 강한, 권력에 대한 탐욕도 있다. 자식을 지키고자하는 모성애와 함께 복잡한 심사의 여성이다. 강인한 여성이 아닌가 생각했다. 극에서 갖고 있는 엘리자베스 캐릭터 호흡을 잘 유지하고, 제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잘 섞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 연습하면서 지켜본 황정민 배우는 어떤가.
▶장영남: “실제 만난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황정민 선배와의 인연은 깊다. 고등학교(계원예고), 대학교(서울예전) 직속 선배님이시다. 그야말로 ‘꼼짝마 선배’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엄마와 아들로 만났다. [리차드3세] 초연 때 황정민 선배가 연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대 위에서 큰 극을 이끌어가는 것이 너무 멋있더라. 에너지가 새롭고 놀라웠다. 이번에 기대감을 안고 연습실에 왔다. 아침 10시에 나와 연습을 하신다. 너무나 열정적이다. 이번 작품에 처음 합류하는 배우들이 몇 분 있다. 우리 때문에 반복적으로 대사를 해주셔야한다. 너무 친절하게 잘 해주시니 나머지 배우들이 대사를 안 외워갈 수가 없다. 열심히 즐겁게 하고 있다.”
- 서재형 연출과의 작업은?
▶장영남: “서재형 연출이 예전에 조연출할 때 일이 기억난다. 오현경(원로 연극인,탤런트) 선배님이 갑작스레 무대에 설 수가 없다는 연락이 왔다. 공연 한두 시간 남겨두고 말이다. 서재형 조연출이 잠깐 연습하고 대타로 공연을 무사히 마쳤었다. 조연출로, 무대 스태프로 함께 한 기억이 많다. 이번에 연출과 연기자로 처음 만난다. 굉장히 섬세하고 디테일하시더라. 배우보다도 더 디테일하게 작품에 들어간다. 많이 배우고 있다. ‘굳히기’, ‘뒤집기’ 등 신기한 말도 많이 쓰신다. 연습 들어가면 그야말로 지치지 않고 달리신다. 이제 조금씩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다.“
- 혹시 무대에서 대사를 순간 잊어버린 경우가 있는지. 대처법은?
▶장영남: “요즘 새벽에 눈이 떠진다. 걱정이 되어 대사를 중얼중얼거리다 다시 잠이 든다. 예전에 영화 찍을 때 갑자기 대사가 생각나지 않았던 적은 있지만 무대에서는 틀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긴장한다. ‘엘렉트라’ 할 때 잠깐 버벅거린 적이 있다. ‘당시 제 정신이야’ 그런 대사였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난 것이다. 머릿속이 하애지더라. ‘당신들이 그렇게 해서 되겠어..’라고 대사를 만들어서 넘겼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장영남
- 앤에서 엘리자베스를 연기하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장영남: “연극이란 것은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순간을 연기하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너무 극단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아이가 죽임을 당하고, 포도주 통에 담긴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아이가 둘인데, 그 아이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아프더라. 제 아이와 동갑이다. 예전에 연기할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는 순전히 상상으로 만들어진 연기라면 지금은 와 닿는 연기인 것 같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예전엔 맘껏 상상했는지 모르겠다.”
- 리차드3세에 대해 말하자면.
▶장영남: “나쁜 사람이긴 한데 해학적인 면도 있다. 자기 스스로 나는 배우가 될 거야라고 말하기도 하고. 동정심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엄격하게 자신을 내몬다. 관객들은 보면서 나쁜 사람임에도 그 캐릭터에 설득 당한다. 사실은 속는 것이다. 그런 것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게 아닐까. 잔인한 악당이다. 비틀어진, 끔찍한 괴물이긴 하지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다.”
- 영화나 드라마를 할 때와 연극을 할 때의 차이는.
▶장영남:“무대작업은 호흡이 길다. 2시간을 하나의 호흡으로 감정을 증폭시키고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TV드라마는 부분부분, 신 별로 찍다보니 감정을 응축해서 신별로 나눠서 보여준다. 연극은 하나의 호흡으로 끝날 때까지 쭉 밀고 가야한다. 그렇게 전체 극을 책임져야하니까 관객과 함께 하는 배우의 책임이 크다. 그런 생생한 현장에서 만나는 숨 막힐 것 같은 짜릿함이 큰 매력이다. 연극을 통해 저의 빈 것을 채워주는 것 같다. 따끈따끈하게 제 몸을 녹여주는 것도 같다. 무대는 큰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저에게도 맹목적으로 무대를 사랑한 20대, 30대가 있었다. 지금은 많이 못해서 많이 죄송하다. 매체 일을 하는 것도 있지만 아이가 생기고 엄마로 책임을 져야할 일이 있어 연극을 못한 이유도 있다.”
- 요즘 시대에 이런 무거운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장영남: “그렇다. 정말 연극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리차드 3세]를 보러 오실 것이다. 정통 연극을 안 볼 것 같지만 여전히 옛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고전극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있다고 본다. 방역관리 철저히 하고 있으니 많이 와서 봐 주셨으면 한다. 13명의 원 캐스트가 5주 동안 열심히 연기할 것이니, 많이 기대해주고 보러와 주시기 바란다.”
- 셰익스피어 시대극은 대사가 많을뿐더러 올드할 수도 있다. 어렵지 않은가.
▶장영남: “사실 고전 대사는 어렵다. 저도 고전극의 대사를 완벽하게 해본 적은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각색한 것이다. ‘빨리 와, 왜 안와. 와 다오.’ 이 정도 느낌이다. ‘햄릿’을 할 때도 조금씩 각색이 되어 어렵지 않았다. 이번 작품은 꽤 쉽게 각색을 해놓은 것 같다. 어려운 말도 있지만, 원대본에 비하면 많이 수월해졌다. 원대본으로 하자면 발성이 중요한데 전 조금 부족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은 그나마 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 연기 인생에 장기적인 목표가 있다면.
▶장영남: “모든 배우가 다 그렇듯이 오랫동안 연기를 하고 싶다. 가늘게 길게.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고 싶다. 하나의 틀에 가둬두고 싶지는 않다.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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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차드 3세]의 작품이 가지는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 입장에서 연극의 관람 포인트가 있다면.
▶장영남: “지루할 틈도 없이 빠른 템포로 밀어붙이는 강렬한 힘이 있다. 고전이라서 어려울 것 같지만 대사 각색을 잘해놓아서 큰 매력이 있다. 13명이 전원이 원 캐스트이다. 엘리자베스는 아이를 지키려고 했지만, 그 죽음을 지켜봐야한다. 그래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장미전쟁을 끝내고 하나로 결합시키는 권력의 큰 힘을 가졌다. 엘리자베스는 끝내 굴하지 않고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킨다.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최근 일상에서 가장 큰 욕심을 내는 대상이 있다면.
▶장영남: “요즘은 아들이죠. 뭘 못 하면 화가 난다. 이것도 잘했으면 저것도 잘했으면 그런다. 적어도 1등을 바라지는 않지만 못하면 속이 상하더라.”
- [리차드3세] 말고 세익스피어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장영남: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도 연극도 그 작품을 좋아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이야기인 것 같다.”
장영남은 작품에서 자신 맡은 엘리자베스의 명대사를 이렇게 뽑았다.
"파괴여, 죽음이여, 학살이여! 내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갈 것이라면 차라리 어서 다가와라. 나 어머니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버텨낼 테니.“
에드워드4세가 죽은 뒤 동생(글로스터 공작)이 왕좌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귀족들을 전격 체포, 처형하기 시작하자 불안감에 휩싸여 절규하듯 내뱉는 대사이다. "파괴여, 죽음이여, 학살이여!“는 셰익스피어 원대본이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이후 줄거리를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장영남 '리차드3세' 포스터
황정민이 글로스터 공작/리차드3세로, 장영남이 그와 각을 세우는 엘리자베스로 나오는 연극 <리차드3세>는 1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된다. 샘컴퍼니는 초연 때부터 ‘리처드3세’대신 ‘리차드3세’로 제목을 표기하고 있다.
[사진= 장영남 /엔드마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