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디마르 요한손 감독은 아이슬란드 사람이다. 영국 위쪽에 위치한 아이슬란드는 인구가 38만명 정도의 ‘오지’국가이지만 그 지리적 풍광 때문에 낯설지는 않다. 워낙 장엄한 천혜의 모습을 갖고 있기에 ‘프로메테우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왕좌의 게임’, ‘오블리비언’, ’인터스텔라‘ 등 수많은 영화의 로케지로 각광받은 땅이다. 바로 이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그리고 미국에서 개봉된 아이슬란드 작품 중에서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가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 바로 ’램‘(원제:Lamb)이다. 아마, 한국에서도 최고흥행기록을 세운 아이슬란드 영화가 될 것 같다. 영화는 괴기스러우며, 환상적이며, 지극히 인간적인, 그러면서도 ‘동물의 왕국’이다. 이 혼란스러운 영화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 아이슬란드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아이슬란드의 산악지대, 저 멀리 설산이 보이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무언가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지고 무리 지어가던 말들이 잔뜩 겁을 먹고 방향을 돌린다. 마리아와 잉바르 부부의 축사에서 양들이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다. 그 양들 중 하나가 비틀대더니 쓰러진다. 누군가(무엇인가)에 의해,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1회차 관람에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곳에 봄이 찾아온다. 마리아와 잉바르는 양에게 사료를 주고, 농사를 짓느라 쉴 틈이 없다. 둘은 말도 거의 나누지 않는다. 그런데, 축사에서 양이 새끼를 낳는다. 부부는 한참 내려다보더니, 그것을 고이 안고는 자기들의 집으로 데려간다.
● 마리아와 잉바르
아무도 찾지 않는 이 외진 곳에서 마리아와 잉바르는 묵묵히 양을 키우고, 씨감자를 심고,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뜻밖의 선물이 주어진 것이다. 관객은 그 선물이 무엇인지 처음엔 자세히 모른다. 카메라는 결코 ‘새끼 양’의 전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둘은 마치 자신들의 자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지중지 키우기 시작한다. 부부는 오랜만에 웃음을 되찾고, 축사엔 활기가 돈다. 하지만, 새끼를 잃은 어미 양은 밤마다 처마 밑에서 메~하고 슬피 운다. 어미 양의 귀에 꽂힌 인식표 번호 ‘3115’는 성경(예레미야 31장 15절)이란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그야 말로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 엄마 양과 피에튀르
마리아와 잉바르가 ‘새끼 양’에 매달리는 이유는 한참 후에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새끼 양의 전모를 보게 되는 것은 영화가 40분이나 진행되고 나서의 일이다. (처음 볼 때는 가히) 충격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이 곳에 잉바르의 형, 피에튀르(비욘 흘리뉘르 하랄드손)가 찾아오면서 불안한 동거가 시작된다. 처음엔 경악하고, 조금씩 이해하고, 하지만 결코 동화할 수 없는 한 집살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 아빠 양, Lamb-man
영화 초반에 관객을 불안으로 몰아넣었던, 그리고 가축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숨소리의 실체가 등장하면서 모든 미스터리가 풀린다. ‘공포를 안겨준 실체’가 드러나면서 영화는 판타지에 현실감을 부여한 셈이다. 따지고 보면 유괴하고, 격리시키고, 살해하는 일련의 행위에 대한 업보인 셈이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가 쓴 소설 [타잔]의 앞부분 이야기는 이렇다. 아프리카 해안에 버려진 백인 커플. 엄마는 아기를 낳고는 곧 죽는다. 그때 이곳을 찾은 유인원 중 하나가 마침 새끼를 잃은 암컷이었다. 요람 위의 그 아기를 데려가서는 밀림의 왕자로 키워지는 것이다. 인간이 유인원 무리에서 자라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가 공포감을 주는 것은, ‘새끼 양’의 모습에서 전해주는 낯설음이다. ‘양’이 인간 사이에서 자라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반인반수’에 해당한다. 어쩌면 인수공통의 요소를 낀 생물학계의 돌연변이인 셈이다. 아이슬란드의 설산에는 ‘토르’뿐만 아니라 ‘램맨’도 사는 모양이다.
영화에서 마리아가 읽고 있는 책이 [개의 심장]이란다. 소비에트 초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가 쓴 이 중편소설은 ‘프랑켄슈타인 스타일’의 이야기를 통해 ‘우스꽝스러운 혁명’을 풍자하고 있다. 한 외과의사가 떠돌이 개를 데려와서 죽은 인간에게서 적출한 장기를 결합시키는 수술을 단행한다. 그 결과물, 창조물의 이야기이다. 사실, 발디마르 요한손 감독이 전한 ‘양의 삶’은 ‘타잔’과도 다르고, ‘불가코프의 개’와도 다르다. 엄연한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생존의 선택이다. 마리아와 잉바르 부부는 이 새끼 양에게 자신들의 죽은 아이의 이름 ‘아따’를 붙여주었었다. 그 ‘아따’는 아버지 ‘램맨’과 함께 눈 덮인 산으로 사라진다. 영화 마지막 마리아의 표정이 흥미롭다. 울다가, 절규하다가, 어느 순간 눈물을 멈춘다. ‘마리아’가 ‘아따’를 찾으려가지 않을 것이다.
▶램 (원제:Dýrið, Lamb) ▶감독: 발디마르 요한손 ▶출연: 누미 라파스(마리아), 힐미르 스나에르 구오나손(잉그바르), 비욘 흘리뉘르 하랄드손(피에튀르) ▶2021년 12월 29일 개봉/15세관람가 #박재환 KBS미디어 #영화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