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족 출신(중국교포) 장률 감독은 중국대학에서 중문학 교수로 있다 우연한 기회에 영화를 찍게 되었고, 한국에 건너와서 ‘학교에 적을 두고’ 여전히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는다. 학교에서 집을 하나 얻어줬는데 은평구 수색이란다. 수색의 집에서 걸어서 굴다리를 지나면 MBC의 화려한 유리사옥을 만날 수 있는 상암동이다. 장률 감독은 신작 ‘춘몽’에서 수색과 상암을 오가며 꿈과 현실을 걷는다.
이번 2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춘몽>은 장률 감독에게는 너무나 현실적인 서울의 이야기이다. 상암과 대비되는 수색은 마치 흑백영화 속의 한 장면같다.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시대에 많이 뒤떨어진,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인 존재들이다. 예리(한예리)는 작은 술집 –이름마저 주막이다–에서 몽상가처럼 존재한다. 그녀 주위에는 ‘덜 떨어진 삼인조’가 언제나 함께 있다. 똥파리 건달 익준(양익준), 탈북청년 백수 정범(박정범), 그리고 틱 장애와 간질을 앓고 있는 종빈(윤종빈)이다. 이들은 뚜렷한 꿈도 야심도 없다. 그렇다고, 예리에 대한 들끓은 욕망도 부재하다. 그저 하루하루를 ‘주막’에서 소일한다. 그러나 흑백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삶이 녹록치 않음을 이해한다. 굳이 이해하려 한다면 말이다.
정범은 일자리를 잃는다. 눈이 너무 슬퍼보여서란다. 익준은 ‘이름으로만 등장하는’ 해파리형에게 엮이고 싶어 하지 않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종빈은 언제 발작이 도질지 모른다. 그리고, 예리는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힘에 부친다. ‘춘몽’은 그런 현실적 어려움에 대한 탈출구를 기다리는 불쌍한 세 남자와 한 여자의 막연한 기다림이다. 힘이 없는, 꿈이 없는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바보같이 몰려다니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이란 것을 관객도 공감하게 된다. 어쩌겠는가. 그들은 ‘상암의 빛’보단 ‘수색의 그림자’에 가까운 존재이다.
감독은 고향을 잊지 못한다
‘춘몽’에서는 휠체어 탄 남자가 영화제작자 이준동이고, 신민아가 정범의 북한 애인이고, 예리를 사로잡은 남자가 유연석이라는 놀라움을 안겨준다. 그리고,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무료로 영화가 상영된다는 인상적인 정보를 안겨준다.
장률 감독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특히 ‘경주’의 소소함과 문학적 향기를 특히나 좋아한다면 ‘춘몽’에도 빠져들 것이다. 참, 제목 ‘춘몽’. ‘춘몽’은 단지 ‘일장춘몽’의 덧없는 꿈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춘몽’이 ‘성몽’(性夢)에 가깝다. 마치, ‘춘화’처럼. 하지만, 기이하게도, 이들은 모두 거세된 남성들이다. 무언가 상실했다. 어딘가에 단단히 짓눌린.
극중에서 ‘고향산천’을 잊지 못하는 예리는 이태백의 시를 읊조린다. 이태백이 26세 때 양주객사에서 지은 ‘정야사’(靜夜思)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간절한 마음이 녹아있다.
牀前看月光 疑是地上霜 擧頭望山月 低頭思故鄕
(침상 앞에서 달빛을 보니, 땅에 내린 서리인가
고개들어 달을 보다 고향생각에 고개 숙이네)
이주경은 그런 예리를 위해 시를 하나 지어준다.
“오래 전 당신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돌아오라고 손짓하던 고향은 당신 대신 늙어가고 있어요
백두산 슬픔으로 반백이 되고, 천지 안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
당신을 그곳에 되돌아주고 싶어요“
영화 ‘춘몽’은 미약을 탄 한 편의 시(詩)다. 양익준이 상암동 영상자료원에서 보면서 분노하던 영화, “1분 내내 계란 껍질 까는 장면만 나온다”는 그 영화는 장률 감독의 장편데뷔작 ‘당시’(唐詩)이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