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3살의 리들리 스콧 감독이 다시 한 번 두꺼운 갑옷과 무거운 칼을 들고 싸운다. ‘에일리언’(1편)과 ‘글래디에이터’의 명장 리들리 스콧의 신작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는 1386년 프랑스 땅에서 벌어진 두 기사의 ‘사생결단’ 결투를 담고 있다. 서부극의 두 남자처럼 먼저 총을 뽑아 상대를 쓰러뜨려야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다. 둔탁한 갑옷의 두 기사는 말 위에 앉아 기다란 창을 들고 마주 달려온다. 말에서 떨어지자 이번에는 칼을 뽑고, 도끼를 들어 상대를 죽이려 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 상황을 아주 특별하게 묘사한다. 이른바 ‘라쇼몽’ 방식으로!
미국의 역사가 에릭 재거는 2004년, 이 사건을 파헤친 책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The Last Duel: A True Story of Crime, Scandal, and Trial by Combat in Medieval France)]을 내놓았고, 이 책을 읽은 맷 데이먼이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영화화를 제안한 것이다. 600여 년 전, 프랑스는 샤를 6세의 치하였다. 이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국과 전쟁을 치를 때이다.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 있고, 영지를 가진 영주가 있었다. 영주는 지주와 기사를 거느리고 있다. 피에르 알레송(벤 애플렉)은 페르슈(Perche) 땅을 지배하는 영주였고, 장 르 카르주(맷 데이먼)와 자크 르 그리(아담 드라이버)는 친구였고, 전우였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 두 사람이 마상 결투를 펼치는 장면이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사단이 났을까. 영화는 장과 자크, 그리고 장의 아내 마그리트(조디 코머), 이 세 사람의 시각으로 진행된다.
우선, 장 르 카르주(맷 데이먼)의 주장. 전장에서 목숨 걸고 열심히 싸우고 돌아왔지만 영주 피에르는 자크 르 그리를 신뢰하고, 편들고, 심복으로 삼는다. 장의 아버지가 죽자 그에게 돌아갈 것으로 기대한 성이 얄미운 자크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마그리트의 결혼 지참금으로 생각한 오누 르 포콩(Aunou-le-Faucon) 땅도 자크가 차지해버린다. 스코틀랜드 전투에서 겨우 돌아왔지만 마그리트가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는다. “당신이 없을 때 자크 르 그리가 나를 강간했다”는 것이다. 장은 그동안 쌓이고 쌓인 분노가 폭발한다. 자크와의 결투를 신청한다.
영화는 자크 르 그리(아담 드라이버)의 진술로 다시 한 번 상황이 반복된다. 자크는 전략적으로 전투를 보지만 장은 오직 무모함으로 칼을 뽑아들고 적진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라틴어까지 익히고, 영주의 비위를 잘 맞추는 정치력을 가진 자신에 비해 장은 사람과 어울릴 줄도 모르는 소인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이 엄청나게 아름답고, 고상한 마그리트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내심 못마땅하다. 장이 저 멀리 떠나자 아무도 없는 성을 찾아와 마그리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끝내 거부하는 그녀를 겁탈한다. 자크는 그 자리를 떠나면서 마그리트에게 “이 일을 남편에게 말하지 말라. 남편이 당신을 죽일 것이야.”라고 입막음한다. 사랑했었고, 강간은 아니었다고 강변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마그리트가 자신의 입장에서 장 르 카르주를 처음 본 순간, 결혼의 과정, 그리고 자크 르 그리에 대한 평소 생각을 털어놓는다. 결국, 샤를 6세는 마지못해 장과 자크의 대결을 허가한다. 오직 신만이 누구 잘못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대결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만약, 장이 죽으면, 장의 아내 마그리트는 거짓말을 한 것이니 발가벗겨져서 화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
맷 데이먼이 이 영화를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부탁한 것은 스콧 감독의 데뷔작도 두 남자의 대결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의 [결투자들](The Duellists, 1977)은 나폴레옹 시절의 프랑스가 배경이다. 1794년에 캡틴 뒤퐁이라는 젊은 프랑스 장교가 장군에게서 명령을 하나 받는다. 캡틴 푸니에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날 무도회 참석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이다. 푸니에가 결투로 지역주민을 살해하였고, 장군은 그 일 때문에 무도회장에서 주민의 항의를 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니에는 그 결정을 불쾌하게 생각했고 오히려 명령을 전달한 뒤퐁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둘은 싸운다.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프랑스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두 사람은 단락적으로 만나 결투를 거듭한다. 부상을 입고,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만나 결투하고, 또 부상을 입고.. 그런다. 무려 19년 동안 17차례 결투를 한다. 정말 끔찍한 대결구도가 아닐 수 없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결투자들' 이후 44년 만에 내놓은 결투 드라마는 어떨까. 시대적 배경이 중세이다 보니 왕의 권력, 영주의 지위, 기사의 임무 같은 ‘왕좌의 게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에서 이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법률시스템의 정비과정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는 그런 역사와 종교, 신념의 문제를 떠나가서 최근 몇 년 사이에 급부상한 ‘여성의 인권’, ‘미투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강간, 성폭력의 피해자’는 마그리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여성의 지위는 한없이 낮고,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시 여성에 대한 강간은 성범죄가 아니라 남편에 대한 재산범죄로 여겨졌다. 남편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시대적 정서가 흐른다. 그리고, 피해자인 아내를 대하는 남편의 모습도 지금의 관점에서는 형편없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칼과 창이 부딪치는 남자들의 법정에 그야말로 여자를 발가벗겨 던져놓고는 ‘신의 은총’으로 ‘양심의 승리’를 저울질하는 것이다. 고귀한 인권은 진흙에 나뒹굴고 엄청난 자아만이 왕과 국가의 이름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마지막 결투는 1386년 12월 29일 파리의 생마르탱 데 샹(Saint-Martin-des-Champs) 수도원의 외벽 중 한곳에서 벌어졌단다. 프랑스의 왕 샤를 11세도 결투 현장을 지켜봤다. 알렉스 로더가 연기하는 샤를6세는 뭔가 병약하고, 변태 같은 인물로 등장한다. 11살에 왕좌에 올랐던 그는 그때 나이 18살이었다. 티모시 샬라메가 나오는 영국왕 헨리 5세로 나오는 넷플릭스 영화 ‘더 킹’에서 아쟁쿠르전투가 펼쳐질 때의 프랑스 왕이다. 이후 그는 정신병에 시달려 ‘광인왕’으로도 불리는 인물이다.
이후 '장'과 '마그리트' 부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후과는 화려했단다.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고. 이후 두 명의 자녀도 더 나았단다. 하지만 10년 후, 장은 오스만 투르크와 전투에서 전사한다. 십자군의 영광을 누린 셈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자크가 마그리트를 강간했는지’는 확인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단다. 그리고 또 하나, 영화에 등장하는 그 아기가 장의 아기인지도 마찬가지로 확인불가란다. 인터넷에서 확인한 바로는 그날 결투가 벌어질 때, 샤를6세 옆에 앉아있던 프랑스 여왕 이사보(세레나 케네디)는 이 시기에 남자아이를 출산했지만, 결투 바로 전 날 사망했다고 한다. 여하튼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는 마초 남자들과 피해자 여자가 등장하는, 무지와 잔혹함이 가득한 중세 기사극이다.
참, 리들리 스콧은 여전히 생생하다.레이디 가가와 아담 드라이버, 자레드 레토, 알 파치노가 출연한 초기대작 [하우스 오브 구찌]가 개봉대기 중이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원제: The Last Duel 2021년 10월 20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상영시간 15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