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
로이터통신사의 모스크바 통신사를 거치고, 2차대전 당시에는 군에서 방첩업무를 수행했던 이안 플레밍은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참신한 스릴러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세계를 무대로 악을 무찌르는 이른바 ‘살인면허’를 가진 요원 제임스 본드가 주인공인 ‘007’시리즈였다. 첫 번째 소설 <카지노로얄>은 1953년 출간되었고, 영화는 <007 살인번호>(Dr. No)가 1962년 첫 선을 보였다. ‘007’영화는 잊을만하면 새 배우의, 새 작품이 끊임없이 나오는 프랜차이즈 오락영화의 대표주자이다. 은퇴했다는 숀 코넬리의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으로 본드 팬들이 혼란을 겪기도 했다. 여하튼 많은 배우들이 ‘더블-오-세븐, 본드,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지만 다니엘 크레이그만큼 각광받은 요원은 없다. 2006년, <카지노 로얄>로 처음 본드 역을 맡은 그는 <퀀텀 오브 솔러스>, <스카이폴>,<스펙트>에 잇달아 출연하며 가장 인기 있는 본드가 되었다. <스펙트>이후 우여곡절 끝에 6년 만에 돌아온 [노 타임 투 다이](감독: 캐리 후쿠나가 원제:No Time To Die)는 그야말로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위엄이 가득한 작품이 되었다. 007영화 자체가 영국의 영광이며, 여왕의 품격이며, 영국인의 자랑임에 분명하다. 마지막이라 더욱 아쉬운 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노 타임 투 다이]는 짧은 007 ‘건배럴’ 오프닝씬이 나오더니 마스크맨(사핀)과 소녀(마들렌)의 긴장감 넘치는 빙판 추적신을 보여준다. 그 장면이 끝난 뒤 [스펙터] 이후의 시간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이탈리아 마테라의 해안도로를 달리는 애스턴 마틴 자동차. 제임스 본드와 마들렌(레아 세이두)이 타고 있다. 둘은 낭만적인 호텔에서 마치 허니문을 즐기는 듯하다. 과거를 잊고 싶으면 종이에 써서 불로 태워버리면 된다는 말을 듣고 마들렌은 몰래 종이에 ‘마스크맨’이라고 쓴다. 그리고, 본드에게 비밀을 털어놓기도 전에 사건을 터진다. 본드가 찾아간 곳은 베스퍼 린드의 무덤. 그곳에서 폭탄이 터지고 본드는 자신을 노리는 악당들과 한바탕 아이맥스급 액션을 펼친다. 본드는 마들렌이 자신을 속였다고 화를 내면 급하게 차를 몰고 사지를 빠져나와 기차역으로 향한다. 황망한 표정의 마들렌은 자신의 배를 쓸쓸히 어루만진다. 그리고 빌리 아일리시가 부르는 주제가가 울려 퍼지는 007 오프닝 장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5년 뒤. 제임스 본드는 자메이카에서 칩거하고 있고, 런던의 Q와 요원들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으면, 블로펠드는 특급교도소에서 갇혀서도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악당인 마스크맨, 루시퍼 사핀은 엄청난 신형 무기를 손에 쥐고, 인종청소를 획책하고 있다. 그 옵션에는 제임스 본드를 죽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제 다니엘 크레이그는 목숨 걸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뛰고, 달리고, 매달리고, 총을 쏘고, 육박전을 펼친다.
● “본드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는 그가 연기하는 다섯 번째 본드 역할을 끝으로 이 장대한 액션물에서 하차한다. 제작자 바바라 브로콜리와 마이클 G. 윌슨은 그의 은퇴식에 걸맞은 작품을 내놓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오래 전 이언 플레밍이 남긴 설계도에 24편의 작품을 통해 펼쳐진 조각들을 한데 모으고, 스토리의 공백과 캐릭터의 의문을 적절하게 재배치한다. 그 사이 코로나 팬데믹은 세계 극장가를 괴롭혔고 말이다. 그렇게 나온 완성품은 무려 2시간 43분. 역대 007 영화 중 가장 길다. 다니엘 크레이그와 레아 세이두와 함께 랄프 파인즈(M), 벤 위쇼(Q), 나오미 해리스(머니 페니), 로리 키니어(테너)등 옛 동료를 만난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도 등장한다. 후임 007 노미(라샤나 린치)는 흑인이며 여성이다. 달라진 세계만큼 달라질 본드의 세계를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겨우 ‘3주 훈련’만으로도 극강의 솜씨를 보여주는 팔로마(아나 데 아르마스)의 활약까지. 007팬이라면 펠릭스(제프리 라이트)도 반가울 것이다. 등장은 말이다!
‘스펙터’를 능가하는 새로운 악당 사핀(라미 말렉)이 벌이는 ‘전 지구적 바이러스전’의 규모에 놀라기 보다는 제임스 본드를 온전히 빛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마지막 선택은 팬에게는 가히 충격적이다.
베스퍼 린드의 묘비에는 ‘1983-2006’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작품 소설 <카지노 로얄>은 1953년 선데이타임즈에 연재됐었다. 소설에서 본드가 업무(?)상 베스퍼를 만나 자신을 소개하는 대사는 이렇다. “00이라는 별호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소. 그저 각오만 서 있으면 되는 것이지. 자랑할 일도 아니고, 부러움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오. 자신의 양심과는 상관없이 상부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살인기계가 바로 00이란 별호가 붙은 인간들이오.”라고. 세계평화를 지키지 위해서 요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는 것과 자기 목숨마저 내놓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원칙을 알고 이 영화를 보면 그의 빈자리가 더욱 크고, 그의 사랑이 더욱 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