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열린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소개된 126편의 작품 중에 한국전쟁을 다룬 흥미로운 다큐 하나가 포함되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판문점’에 대한 역사를 다룬 [판문점](감독: 송원근 김용진)이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안고 사는 우리에겐 그 의미가 남다를 것이다. 그런데, 이것 역시 시간이 흐르고, 세월의 풍파 의해 조금씩 망각되는 곳이다. 가끔 남과 북이 첨예하게 갈등하거나, 혹은 평화에 대한 작은 기대감이 넘쳐날 때 이곳이 뉴스에 등장한다. ‘판문점’은 우리나라에서 독특한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는 독립언론기관 ‘뉴스타파’의 취재진이 미국의 문서기록청(NARA)에 수집한 자료를 기반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뉴스타파’라!
‘판문점’은 남과 북, 양측에 모두 특이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한국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에 속하고 북한에선 황해북도 개성리 판문점리라는 행정적 주소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 영토인 동시에 북한의 영토이다. 그 판문점을 어떻게 그 곳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뉴스타파의 ‘판문점’은 미국 문서기록청(NARA) 소장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 기원을 찾아간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했고, 잇달아 9월 미군이 서울에 들어섰다. 그리고 5년간 한반도에서는 불안정한 정세가 이어지더니 결국, 기어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의 양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개전 초기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에 성공한 연합군은 백두산 앞까지 진격한다. 하지만, 위기를 느낀 중공(중국)의 개입으로 후퇴한다. 그렇게 1951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남과 북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한다. 전쟁이 일어나고 1년이 지나자 휴전협상이 시작된다. 미국은 터너 조이 해군제독이, 북한은 남일 대장이 대표가 되어 개성의 고급식당(사진으로 봐서는 그냥 커다란 기와집) 내봉장에서 모여 휴전 협상안을 논의한다. 이때 다뤄진 내용은 ▷휴전에 대한 세부사항 ▷군사분계선(MDL) 설정 ▷전쟁 재발 방지안 ▷남한 내 외국군철수였다. 네 번째 안은 미국의 반대로 거부된다.
‘내봉장’은 지금의 ‘판문점’이 아니다. 미국은 회담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B29를 동원, 평양에 대한 대대적 폭격을 강화했다. 양측 다 ‘삐라’를 쏟아 부으면 심리전을 펼쳤다. 그런 공방을 잠시 펼치고는 1951년 9월 휴전협상이 재개된다. 내봉장에서 조금 내려온 ‘널문리’가 새로운 협상장으로 채택되었다. 송악산 아래 개괄지였던 이곳에 판문점 건물이 뚝딱 세워지고 그곳에서 집중 회담이 전개된다. 그리고, 11월 첫 주말이 되자 주요성과가 이뤄진다. ‘현재 전선을 기준으로 잠정적 휴전선이 만들어지고, 4Km의 완충지대, 비무장지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협상의 최대 난제는 전쟁의 책임이나 휴전여부나 휴전선 위치가 아니었다. 포로 문제였다. 각 측이 수용하고 있던 전쟁포로에 대한 처리문제였다. 이 문제로 지루한 협상은 2년간 더 지속된다. 지금 와서 보면 조금 의아한 이슈이기도 하다. 남측(연합군=미군)은 포로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선택을 주장했고, 북측은 무조건적인 전원송환을 주장했다. 북측의 주장 근거는 ‘제네바 협약’이었다. 여하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양측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지키기 위해, 혹은 차지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 전면전인 것 같지만 결국 국지전이었고, 소모전이었다.
그런 난리 통에 1953년 들어서면서 반전의 계기가 주어졌다. 미국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소련의 스탈린이 죽고 말렌코프가 권한대행을 맡으며 서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 덕분인지 4월 들어 포로교환 문제에 진전이 있었다. 일단 부상포로만 먼저 교환하자는 ‘리틀 스위치 작전’이 펼쳐진 것이다. 6월 13일 부상포로에 대한 송환이 완료되자 정전 협상이 재개되고, 전선에서는 마지막 고지전의 총력전이 펼쳐진다. (이건 영화 ‘고지전’에서 잘 보여주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대표단 수석대표 W.K. 해리슨 중장과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 남일 중장이 판문점에서 한글-영어-중국어 3개 국어로 작성된 정전협정서에 서명하는 조인식이 열렸다. 서명에 걸린 시간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대표단 서명에 이어 문산의 미군 캠프에서 대기하던 마크 클라크 유엔사령관이 서명한다. 그렇게 정전협정문에는 남일(북한)-해리슨(미국)과 함께 김일성(북한)-팽덕회(중국)-클라크 (연합군)의 서명이 남는다.
다큐멘터리 [판문점]에서는 우리가 잘 몰랐던 내용을 사항을 알게 된다. 정전협정 조인식이 마무리되자 유엔군과 공산군은 곧바로 후속조치를 위해 움직인다. 군사정전위원회 관련, 새로운 판문점 건설, 공동경비구역 문제, 인도군이 관할하는 임시포로수용소 문제 등이었다. 속전속결로 건설 작업이 이어졌고 10월 지금 볼 수 있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완성된다. 이후 양측에서 초소나 휴게소(평화의 파고다/자유의 집) 등 부속건물을 경쟁적으로 더 짓는다. 남과 북의 대결구도는 판문점을 벗어나 동서 250 Km의 군사분계선의 모습에서 살기(殺氣)를 띠기 시작한다. 정전협정에 따라 임진강에서 동해안까지 총 1,292개의 말뚝(경계표지판)을 듬성듬성 박고 남과 북을 나누는 것이었다. 표지판 중 696개는 UN이, 596개는 북한이 관리한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북으로 2Km, 남으로 2Km의 비무장 지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서면서 격화된다. 베트남전쟁 확대, 1968년 1.21사건, 푸에블로호 사건 등이 잇달아 일어나며 남은 남방한계선을 따라 지금과 같은 Y형 철책 철조망을 세운 것이다.
다큐멘터리 [판문점]에서는 그 이후 이야기와 이곳에서 펼쳐지던 우화를 들려준다. [판문점]은 전쟁의 와중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의 한복판에 담판장이 만들어지고, 전쟁 속에서 금이 그어지고, 전쟁 후의 대치구도를 확정지은 것이다. 그렇게 70년을 한반도 허리를 잘라낸 채 한국인의 가슴에 어떤 의미에서든지 깊은 못을 박고 서 있는 것이다.
‘판문점’을 만든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는 한국 언론의 고질적 병폐인 정파성과 상업주의를 배격하고 오로지 진실의 편에서 탐사저널리즘을 수행한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공적 사안의 본질과 맥락을 짚어낸다고 또한 주장한다. 이들은 가끔 깜짝 놀랄만한 특종을 낸다. 그 와중에 1년에 한두 편의 영화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뉴스타파’의 작품을 보면 MB시대 해직언론인들의 투쟁을 다룬 <7년-그들이 없는 언론>(감독:김진혁,2016), 국정원 간첩조작사건을 다룬 <자백>(감독:최승호, 2016), 공영방송 잔혹사를 다룬 <공범자들>(감독:최승호,2017),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의 27년 투쟁기록을 다룬 <김복동>(감독:송원근,2019), 월성원자력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월성>(감독:남태제,김성환,2019),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감춰진 역사를 다룬 <족벌-두 신문 이야기>(감독:김용진,박중석,2020) 등이다.
‘뉴스타파’가 미국 NARA에서 오래된 영상물을 찾기 전에도 학계에서는 발굴 및 소개작업이 있었다. 강성현 교수와 전갑생 연구원의 노력으로 당시 사진들이 발굴되어 ‘한겨례21’에 ‘사진 속 역사, 역사 속 사진’이라는 장기 기획물이 연재되기도 했다. 그 결과물은 <작은 ‘한국전쟁’들>이라는 단행본으로도 나왔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는 이런 작품도 소개된다. 좋은 영화제이다. ▶판문점 (영어제목:PAN MUN JOM, You have never seen) ▶감독:송원근, 김용진 ▶상영시간:7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