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홍상수 감독이 칸 영화제 기간도 아닌데 갑작스러운 뉴스의 중심에 섰다. 묘한 시점에 KBS 1TV ‘독립영화관’을 통해 방영된 그의 16번째 장편 ‘자유의 언덕’은 6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속에 홍상수 특유의 미니멀한 미학을 압축해 보여준다. 남녀가 만나 술을 마시고 끝없는 대화와 넋두리를 늘어놓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이번에는 모텔 대신 북촌의 고즈넉한 게스트하우스가 무대가 된다.
영화는 일본 남자 모리(카세 료)가 과거 사랑했던 어학원 강사 권(서영화)을 찾기 위해 서울 북촌을 방문하며 시작된다. 모리는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게스트하우스 주변 사람들과 카페 ‘자유의 언덕’ 주인(문소리)을 만나며 한국 특유의 민낯을 경험한다. 감독은 여기서 ‘뒤섞인 편지’라는 장치를 활용한다. 권이 모리의 편지 뭉치를 떨어뜨려 순서가 뒤바뀌면서, 영화는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 채 조각난 일상의 파편들을 뒤죽박죽 내보낸다.
극 중 모리는 ‘시간’이라는 책을 읽으며 “시간은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틀일 뿐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철학적인 대사를 읊는다. 이는 홍상수 감독이 직접 쓴 문장으로, 어쩌면 앞뒤가 맞지 않는 삶의 우연과 기억의 모호함을 정당화하는 감독의 선언처럼 들린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윤여정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일본인에 대한 인상비평이나 한국인의 과잉 친절, 오지랖에 대한 묘사는 날카로우면서도 불편한 리얼리티를 선사한다.
카세 료를 비롯해 문소리, 김의성, 윤여정 등 쟁쟁한 배우들은 힘을 뺀 채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대사들을 툭툭 던진다. 하지만 세심하게 설계된 그 대사들이 모여 한 사람의 성격과 기억을 형성하고, 마침내 시간을 지배하게 된다. ‘자유의 언덕’은 시간이라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순간의 진실을 포착하려는 홍상수식 변주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