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기간도 아닌데 갑자기 홍상수 감독이 영화뉴스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토요일 밤 12시 10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KBS독립영화관’ 시간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편성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물론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아니다. 그 전작 <자유의 언덕>이다. 2014년에 개봉된 영화이다. ‘독립영화관’ 관계자는 참으로 공교롭게 편성된 것이란다. ‘독립영화관’ 라인업은 보통 한 달 전쯤에 편성이 확정되니 말이다. 홍상수 감독의 16번째 장편연출작 <자유의 언덕>은 67분짜리 영화이다. 홍상수영화답게 별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남자가 나오고, 여자가 나오고, 또 남자가 나오고, 술도 마시고, 끝없이 이야기하고, 넋두리 푸는 그런 영화이다. 물론, 이번엔 여관이나 모텔은 안 나온다. 대신 북촌마을 한옥스타일의 게스트하우스가 등장한다. 그게 특별하다면 특별한 영화.
굳이 영화내용을 옮기자면, 한 일본남자의 한국여자 찾기이다.
모리(카세 료)라는 남자가 여행가방을 끌고 북촌마을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온다. 이 남자 2년 전, 이곳 서울에서 어학원 강사 권(서영화)을 알게 되고 결혼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2년 만에 다시 서울로 와서는 권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머물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와 그 주변에 있는 ‘자유의 언덕’이란 이름의 카페에서 이런저런 한국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나름 다이내믹한 ‘민낯의 한국 익히기’에 나서는 것이다.
이런 사적이고도, 미니멀한 영화에 조예가 깊은 홍상수 감독은 몇 가지 장치로 영화적 재미를 더한다. 제일 먼저 ‘권’은 모리의 두꺼운 편지를 받으면서 지난 이야기를 회상하게 되는데, 감독은 권이 편지를 떨어뜨리며 편지의 순서가 뒤바뀐다. 그래서 영화는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는 뒤죽박죽된 일상의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어느 일이 먼저이고, 어떤 사람이 나중인지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카세 료는 작품에서 <시간>이란 책을 읽고 있고, 책의 구절을 하나 읽는다. “시간은 실존하는 그 무엇인가가 아니다. 우리의 뇌가 과거, 현재, 미래란 시간의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꽤나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기실 이 말은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홍상수 감독이 쓴 내용이란다. 그러니 굳이 그런 대사 하나에 골몰할 필요는 없다. 홍상수작품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그렇나? 그렇다 치지 뭐~”하면 되는 것이다.
굳이 일본사람, 혹은 외국인의 시선으로 한국 사람의 소소한 감정과 특징을 잡아내는 것은 홍 감독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윤여정의 입을 통해 “일본사람은 착하고, 깨끗하고, 예의바르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인상비평일 뿐이며, 홍상수 영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 작업멘트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한국인의 과잉친절, 혹은 호기심, 오지랖, 체면치레, 기타 등등이 날카롭게 그려진다.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불편하게 말이다. 그런 개인적 리얼리티가 홍상수 작품에 매료되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이름만으로도 꽤 많은 배우들이 기꺼이 이 영화에 출연하여 자유롭고 리얼한 생활연기를 펼친다. 일본배우 카세 료를 위시하여 문소리, 서영화, 김의성, 윤여정, 기주봉, 이민우, 정은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한 장면에서 별로 의미 없을 듯한 대사를 툭툭 던진다. (물론, 세심한 공을 들인 대사이지만!) 그런 순간이 모여, 기억을 형성하고, 그 사람의 성격을 판정 짓고,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자유의 언덕>에 온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말이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