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하던 말장난 중에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라는 것이 있다. 한글 띄어쓰기를 활용한 언어유희이다. 그런데, ‘가방’에 들어가는지 ‘방’에 들어가시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오늘 밤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 방송되는 이민섭 감독의 2019년 단편영화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이다. 오늘 독립영화관을 통해 방송되는 SF단편선 세 편 중 하나이다. 이제 독립영화/단편영화에서도 흥미로운 SF영화를 만나볼 수 있다.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마블 같은 SF는 아니다. 참신하고, 여운이 남는 드라마이다.
“민지야, 바람이나 쐬려 갈래?”라는 소리가 들리더니 교통사고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아버지(김종수)는 식물인간이 된다. 딸 민지(박수연)는 아버지의 기억을 이식한 ‘메모리 로봇’ 서비스를 이용한다. 조그만 인형 같은 로봇을 가방에 달고는 아르바이트하는 커피숍에도, 취직 면접장에도 함께 간다. 아버지의 기억과 목소리만 남은 로봇은 끊임없이 딸과 대화를 나눈다. 평소 아버지는 사는 게 바빠서였는지 딸과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딸은 ‘메모리 로봇’의 아버지 목소리와 대화하는 것이 좋다.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던 아버지가 깨어나자 이제 ‘메모리로봇’의 기억은 용도 폐기된다. 깨어난 아버지와 딸, 대화를 나눌까.
우리가 어렸을 적, 아버지란 존재는 엄마만큼 친근하고 푸근했다. 그런데 아이가 커갈수록, 아버지가 (회사에서) 승진할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지고, 관계는 소원해진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겠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근엄해지고, 과묵해지고, 멀어지는 것이다. 만약 영화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자식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떤 순간을 떠올릴까, 그리고 영원히 그 기억을 함께 하려고 할까.
이민섭 감독은 “로봇이 된 아버지는 딸이 어렸을 적 함께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딸 역시 아버지 로봇과 함께 다니며 잊고 있었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다시 떠올린다. SF 설정을 통해 가족의 관계 회복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연출의 변을 밝힌다.
17분이라는 짧은 영화이지만 아버지와의 기억, 그리고 가족과의 소통의 따뜻함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독립단편영화이지만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가 보여주는 미래적 느낌을 주는 장면도 있다. 최근 개봉된 휴 잭맨 주연의 제작비 6800만 달러의 SF대작 ‘레미니센스’도 찾지 못한 인간의 따뜻한 기억을 뽑아낸 훌륭한 작품이다. 정말 SF는 ‘머니’가 아니라 ‘아이디어’임을 자각시킨다. 참, 같은제목의 영화가 또 있다. 김오지숙 감독의 2017년 단편영화 제목도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이다. 자세히 보니, 이민섭 감독의 이 영화 제목 끝에는 느낌표(!)가 하나 더 있다. 흥미롭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영어제목: Daddy in the Bag ▶연출/각본/제작:이민섭 출연:박수연, 김종수 촬영:김우상 로봇디자인/모델링:김용진 CGI:김영선 시간:17분
[인터뷰] 이민섭 감독 ‘영화에 관해 궁금한 것들’
Q.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를 연출한 계기가 있다면?
▶이민섭 감독: “어렸을 때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것 같은데, 자라면서 대화가 적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는 은퇴하시면서 동시에 집에서 함께 지내는 시기가 오자 소통이 많아지며 관계가 회복되었다. 인간관계는 나이와 직업 같은 외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만약 사회로부터의 아무런 제약이 없는 로봇이라면 더 진실된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Q. 교통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정보는 A.I.로 입력해 로봇 안에 담긴다.
▶이민섭 감독: “사고를 당하기 전의 근엄한 아버지 모습이 아닌 귀여운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기준이었다. 로봇 디자인을 한 김용진 아티스트와 함께 다양한 소형로봇들의 이미지를 비교해보며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에 어울리는 크기와 형태를 잡았다.”
Q. 아버지의 모습을 인공지능 로봇으로 표현한 이유는?
▶이민섭 감독: “인공지능이 자체보다는 살아있던 사람의 기억을 복사했다는 부분이 중요했다. ‘만날 수 없는 사람과 다시 대화할 수 있다’는 설정은 판타지의 영역이니 인형으로도 표현 가능했지만 관객들에게 환상이 아닌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로봇으로 만드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Q. 인공지능 로봇 아버지가 카페 사장에게 한마디 하는 장면이 있다.
▶이민섭 감독: “마치 어렸을 때처럼 ‘부모님이 자식을 보호해주는 느낌’을 딸에게 주면서 아빠로봇의 신체적 한계로 웃음을 주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Q. 딸과 인공지능 로봇 아버지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민섭 감독: “지하철 장면은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에서 촬영했다. 영화 연출부를 하던 시절 제가 찾았던 로케이션 장소였는데, 채택되지는 않아 아쉬웠다. 이번 작품 프리프로덕션을 하면서 미래적인 느낌의 이동장면이 필요해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지하철 안 유리에 표시되는 안내 이미지들은 CG로 추가한 부분이다.”
Q. 주인공 딸은 박수연 배우가, 아버지는 김종수 배우가 연기한다.
▶이민섭 감독: “박수연 배우는 대학생 때 수업도 같이 듣고 준비하던 영화 이야기도 많이 나눴던 터라 친분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 영화 <변산>의 연출부를 할 때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의 시나리오를 고치고 있었는데 마침 박수연 배우님의 출연 장면이 있어서 의견교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만들게 되었다. 김종수 배우님의 경우 <아수라>의 연출부를 하면서 나중에 꼭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실제로 이루어져서 기뻤다.”
Q. 아버지는 주로 목소리로 등장, 박수연 배우가 혼자서 하는 연기도 많이 있다.
▶이민섭 감독: “영화에 나온 인공지능 로봇 아버지는 대부분 CG이다. 그 때문에 박수연 배우는 연기를 세 번 해야 했다. 움직이지 않는 목업(mockup) 로봇을 보며 한 번, CG용 초록색 솜인형을 보고 한 번, 마지막으로는 상대 배우 없이 실제 연기하느라 여러모로 고생했다. 그러다 아버지 역의 김종수 배우와 실제로 대화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드디어 사람과 연기한다며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Q. 아버지와 딸은 사고 이전에는 함께 나누지 못했던 일상을 사고 후에 두 사람은 많이 나눈다.
▶이민섭 감독: “아버지는 또 다른 자신(로봇)의 말을 통해 자신의 진짜 마음을 깨닫게 되었고, 딸 역시 로봇과의 시간을 통해 잊고 있었던 옛날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었다. 사고 후 두 사람의 사이는 확실히 달라진다.”
Q. 작품은 ‘SF단편전’ 타이틀로 방영된다. 제작 과정 속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이민섭 감독: “지금까지 SF 혹은 판타지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SF’는 제가 영화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한다. 예산이 크지 않은 독립영화라서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CG 작업을 끝까지 해주신 김영선 감독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SF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유하기 가장 좋은 장치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상황을 바로 대입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말하다보니 관객들 입장에선 거부반응 없이 객관적으로 작품을 볼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영화 속 메시지가 스며들지 않을까 싶다.”
Q. 올해 또 다른 차기작이 선보일 예정이라고.
▶이민섭 감독: “앞으로도 계속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올해는 두 편의 영화를 발표할 예정이다. 판타지, 스릴러 장르이자, 공승연, 조복래 배우가 출연한 <애타게 찾던 그대>는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소개되었다. 그리고 SF, 코미디 장르인 <오늘의 초능력>이 하반기에 공개될 예정이다.”
Q.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는 시청자분들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이민섭 감독: “2007년 고등학생 때 찍었던 영화가 방송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땐 처음이어서 시청자들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기회인지 잘 몰랐다. 14년 만에 이렇게 TV로 저희 영화가 방영된다니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민섭 감독과의 인터뷰는 KBS 독립영화관 송치화 작가와의 서면인터뷰로 진행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