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청년’의 상한선을 정한다면? 입시지옥, 취업난, 생활고, 그리고 지지부진한 연애까지. 각자의 삶에 있어서 청춘의 한때를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청운의 꿈을 품었고,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하며 스스로 담을 쌓으며 달려온 시간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도, 사람들이 그렇게 호의적이지도 않다. 오늘 밤 방송되는 KBS 1TV 독립영화관 시간에 만나보는 단편 두 편이 그렇다. 독립영화계의 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상희가 주연을 맡은 [박미숙, 죽기로 결심하다]와 [늦은 휴가]를 보면 특히 누군가에겐 흘러가버렸을 그 청춘의 서글픔이 느껴진다. 우선 나상진 감독의 [늦은 휴가]를 본다.
● 그해 늦은 여름, 나는 오랜만에 늦은 휴가를 가졌다
늦여름,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선아는 문자를 받는다. 드디어 첫 직장을 갖게 된다. 고시 준비 하느라 모든 것을 끊고 산 세월이 얼마인가. 서른 중반에 겨우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첫 출근을 앞두고 짧은 휴가란 걸 떠난다. 여름이 끝난 바닷가의 황량함. 친구 진향(전수지)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해본다. 진향은 반가움과 함께 남자를 소개시켜준다. 카페사장이라는 남자, 배우가 되겠다는 완규(우지현)를 그렇게 만난다. 그런데, 완규는 카페 사장이 아니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된다. 진향과 선아는 공연장을 찾아 완규의 무대를 지켜본다. 그리고 셋은 웃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29분 짜리 단편 [늦은 휴가]는 취직을 위해 발버둥 쳤고, 이런 저런 경쟁에서 조금씩 뒤처지며 친구와 연락을 끊게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이다. 굳은 심지로 달려왔지만 꿈은 점점 현실에서 멀어져만 간다. 가까스로 한 걸음 나아갔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레 옛 친구를 떠올린다. 그런데 사실 오래된 친구도, 새로운 친구도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내가 봤을 때는 행복해 보였던 사람도,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한다고 느꼈던 순간도 계절의 변화처럼 바뀌어간다.
나상진 감독은 ‘변화무쌍한 마음, 말할 수 없는 상처, 아주 사적인 저항, 그리고 젊음’을 영화 전체에 아름답게 담아두려 했단다. 영화를 보고 나면 선아도, 진향도, 완규도 각자의 삶을 꾹꾹 밟고 전진할 것이라 믿을 것이다. 그들의 청춘은 이미 지난여름에 지나갔고, 이제 인생의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LATE IN THE SUMMER, FALL’이다. 어느새 가을이 된 것이다. 참, 이 영화는 넓게 보아 퀴어영화에 속한다.
●●● [인터뷰] 나상진 감독 “‘늦은 휴가’에 대해 궁금한 것들‘ ●●●
Q. <늦은 휴가>를 연출한 계기한 계기는?
▶나상진 감독: “줄곧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단, 하고 싶은 말이 아닌 찍고 싶은 무엇을 찾아 긴 시간 헤매고 있었다. 평소 가던 카페가 문을 닫는 새벽 두 시의 귀갓길에 여느 날처럼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초록불이 켜졌는데 건너지 못하고 옆에 선 가로수를 올려다보았다. 깜빡 거리는 신호등의 불빛이 나뭇잎들을 더 쨍한 초록색으로 물들이기를 반복하다 곧 빨간불로 바뀐다. 그러자 단풍이 든 것처럼 새빨개졌다. 그 자리에서 본 이미지는 늦여름과 초가을, 그리고 더 깊은 가을이 되는 영화 속 시간 배경에 대한 단서였다. 얼마 뒤 ‘터널 속에서 갓 빠져나온 인물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라는 첫 번째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것을 붙잡았다.”
Q. 제목 ‘늦은 휴가’의 의미는?
▶나상진 감독: “주인공 선아(이상희)는 다른 사람과 달리 매번 모든 것에 늦어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반영한다. 그것이 취업이든, 결혼 제도로의 편입이든 우리가 속한 세상의 오랜 관념에서 말이다.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 감추어 있던 감수성을 잠시나마 꺼내 듯, 깊은 터널 속에서 몇 년을 숨 쉬던 선아가 이제 무엇을 꺼내고 느끼고 확인하게 되는 지를 함께 봐주셨으면 한다.”
Q. 휴가를 떠난 선아가 진향에게 전화를 합니다. 오래간만에 전화를 하는 것 같은데.
▶나상진 감독: “첫째, 사랑에 관련한 감정 때문이다. 둘째는 직업 없이 고시 공부와 취업준비를 병행하던 선아는 사회와의 끈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헐거워져 있다. 선아와 같은 상황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의적인 상황이다. 고시공부와 취업준비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사회 안에서 ‘생산적’인 일상을 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예전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연락을 취한다. 일단 너무 외로웠고, 또 사람이 그리웠고, 내가 나왔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도 싶은 것이다. 그런 선아에게 첫 번째로 떠오른 사람이 진향(전수지)다. 영화 초반에 진향은 등장인물들 중 일반적이거나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처럼 묘사된다.”
Q. 선아는 ‘이상희’ 배우가 연기합니다. 우지현, 전수지 배우를 캐스팅 하게 된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나상진 감독: “시나리오를 다 쓸 때까지 캐스팅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글 속의 선아, 완규, 진향은 머릿속 어딘가에서 마치 원래 존재하던 것처럼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제가 명확히 바라게 됐던 세 분이 이상희, 우지현, 전수지 배우이다. 무턱대고 조른 감이 없지 않은데도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다.”
Q. 촬영하는 동안의 현장 에피소드가 있다면.
▶나상진 감독: “선아(이상희)와 완규(우지현)가 처음 만나 술을 마시고, 바 밖의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시나리오 상 그 장면은 선아가 이미 담배를 피우고 있고 완규는 라이터를 잘 못 다룰 정도로 취해서 결국 담뱃불을 붙이지 못한 채 마무리된다. 2회 차 촬영 때 그 장면을 찍고 있는데 이상희 배우가 완규에게 담뱃불을 붙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뜻대로 하니 정말 장면이 생생하게 나와서 그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그 날의 남은 장면들을 마저 촬영하고, 새벽에 퇴근하는데 멍하니 운전하다 갑자기 울컥했다. 선아가 된 이상희 배우의 그 마음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아, 완규, 진향이라는 인물은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쓰는 동안 혼자 아파하며 앓았던 인물들이다. 배우들을 통해 그들이 여기에 살아있고, 살아서 저와 함께, 그리고 관객들과 함께 있을 거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제가 그려놓은 것보다 더 온기를 가진 사람들로.”
Q. 연출의도에 남긴 ‘아름다운 그들 각자의 순간’은?
▶나상진 감독: “‘각자의 순간’이라고 표현한 것은 연출하던 당시 세 인물 관계에 초점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인물이, 그리고 영화 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삶을 살고 있고, 각자의 고민으로 인해 스스로와 싸우고 있던 와중 서로를 만나 인생의 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간들로 인해 인물들의 관계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당연한 슬픔이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인물들이 세상의 관념에 쫓기지 말고 각자 이해되지 않는 자신의 시간을 원하는 만큼 지켜 냈으면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 순간을 절실히 기록하는 것이었고, 그 때 그 변화무쌍한 마음, 말할 수 없는 상처, 아주 사적인 저항, 그리고 젊음을 영화 전체에 아름답게 담아두려 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꼽는다면, 후반부에 활짝 웃고 있는 세 인물들의 얼굴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다.”
Q. <늦은 휴가> 이후 차기작은 어떤 작품이 될까요?
▶나상진 감독: “‘휴가’와 관련된 또 다른 글을 쓰고 있다. 기대해주세요.”
Q.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는 [독립영화관] 시청자분들에게 인사.
▶나상진 감독: “독립영화관을 통해 이 영화를 보여드릴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조금의 영감과 위로를 가져가실 수 있다면 좋겠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건강하시길, 건강해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나상진 감독과의 인터뷰는 KBS 독립영화관 송치화 작가가 서면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