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12시 35분 KBS 1TV의 ‘KBS독립영화관’ 시간에는 꽤 울림이 큰 ‘싱가포르’ 영화 한 편이 방송된다. 지난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상영된 천쯔이(陳哲藝,안소니 첸) 감독의 ‘일로 일로’라는 작품이다. 싱가포르 영화를 만나보기도 쉽지 않은데 영화 자체도 꽤 좋다. 아니 훌륭하다.
‘일로 일로’는 1997년 아시아경제(외환/금융)위기 당시 싱가포르의 한 소시민 가정의 이야기를 그린다. 조그만 회사의 영업사원인 아버지, 둘째를 임신한 몸으로 경리일을 하는 어머니. 이 맞벌이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은 학교에서 공부보단 사고치기에 바쁘다. 집안일을 들 요량으로 필리핀출신의 가정부를 들인다. 아들놈은 필리핀 아줌마가 맘에 들지 않지만 같이 지내고 보니 정이 든다. 아빠, 엄마는 회사일로 바쁘고 자신에겐 관심도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이 집에도 전 지구적 경제위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들이닥친다. 해고와 경제적 궁핍. 그 여파는 필리핀 출신의 가정부에게도 전해진다. 그만 둬야하니 말이다. 그동안 정이 든 아들은 이 상황이 못 마땅하다. 국가적 경제위축에 따른 어른들의 곤란함은 초등학교 아이에게도 철들어야하는 양분이 되는 모양이다.
‘일로일로’는 그해 말에 열린 50회 대만 금마장영화시상식에서 지아장커의 ‘천주정’,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 등 쟁쟁한 작품들을 제치고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안소니 첸 감독은 신인감독상과 각본상까지 차지했다. 이 작품에는 감독 자신의 개인적인 가정사가 투영되었다고 한다. 실제 1997~98년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휘청하게 만든 금융위기 때 아버지는 실직하고, 집은 팔아야했고, 차도 바꿔야했던 ‘경제적 곤란’, 그리고 자신의 말벗이었던 필리핀 가정부를 내보내야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영화에 담긴 것이다.
영화에서는 아시아금융위기 당시의 경제적 위축현상을 잘 보여준다. 한 아파트에 살던 이웃이 투신자살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아버지는 해고당하고, 시급 받는 경비자리를 힘들게 구하지만 아내에게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 밤마다 집밖에서 끊었던 담배를 태우며 걱정을 한다. 엄마는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채한다. 엄마도 회사에서는 다른 직원의 해고통지서를 작성해야한다. 필리핀에서 온 가정부도 나름의 가정사와 경제적 곤란이 있다. 오직 아이만이 태평세월인지 모른다.
영화는 그런 경제적 곤란을 이야기하면서 여러 곁가지를 던져준다. 외주노동자에 대한 불신, 착취 등의 이야기. 그리고 (당시의 전자오락기기) ‘다마고치’를 쥐고 사는 아이, MP3가 없던 시절 워커맨류의 오디오기기, 일확천금을 노리는 복권 등등. 그런 고통의 시간을 겪으면서 아이는 상황을 이해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어느새 성장하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 즈음이면 정말 소년은 훌쩍 자라 있다.
우리나라도 그 당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비록 지금은 ‘금모으기 운동’만이 기억되는 시간들이겠지만 많은 가장들이 직장에서 내몰렸고, 온 가족들이 극한의 고통을 겪어야했으니 말이다.
이 영화의 중국어제목은 ‘爸媽不在家’(아빠어마, 집에 안 계셔)이다. 영어제목 '일로 일로'는 극중 필리핀 가정부의 고향도시이다. 이 영화는 그해 깐느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한편 이번 달 KBS 1TV 독립영화관 시간에는 ‘일로 일로’에 이어 김태용 감독 최우식 주연의 ‘거인’(10일), 아홉 살 때의 김새론을 만날 수 있는 '여행자’(17일), 그리고 서울독립영화제 기획 특별단편선이 2주 연속(24일, 12월 1일)으로 방송될 예정이다. (영화/박재환)
일로 일로 (Ilo Ilo/爸媽不在家, 2013 싱가포르)
감독: 안소니 첸 (陳哲藝)
출연: 양안안(楊雁雁, 엄마), 진천문(陳天文,아빠),안젤리 바야니(테레사), 허가락(許家樂,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