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0일) 밤 12시 30분, KBS 1TV 독립영화관 시간에는 굉장히 문학적인 작품이 한편 방영된다. 중국 연변출신의 조선족 감독 장률 감독의 2014년도 작품 ‘경주’이다. 중국에서의 활동을 끝내고 주로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어오고 있다. ‘중경’, ‘이리’, ‘두만강’ 등 그의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뭔가 미니멀함을 느낄 수 있다. 영화 ‘경주’에서는 대한민국 천년고도 경주를 배경으로 박해일과 신민아 등 등장인물들의 한없이 사적인 이야기와 기억들이 불 꺼진 천마총 내부만큼이나 조용하게 채집된다.
중국 북경대에서 ‘동북아정치론’을 가르치는 최현 교수(박해일)가 친한 형의 부고를 듣고 한국을 찾는다. 장례식장에서 들은 이야기는 “예쁘장하게 생긴 그의 아내가 형을 잡아먹었다”는 세속적인, 그리고 다분히 성적인 뉘앙스를 띈 이야기이다. 장례식장을 나온 최현은 하릴없이 경주를 걷다 이리솔이라는 전통찻집에 발길이 닫는다. 7년 전 처음 경주에 왔을 때 들렀던 그 찻집의 벽에 붙었던 춘화(春畵)가 사라졌다. 찻집 주인 공윤희(신민아)는 뜬금없는 춘화의 행방을 묻는 이 사람이 변태라고 생각되어 친구(신소율)에게 문자를 보낸다. 망월사 주지가 줬다는 황차를 마시며 “경주에서 공자의 후손을 만나다니..”이야기를 꺼낸다. 그리고 최현은 공윤희를 따라 술집에 가게 되고 윤희의 경주지인들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함께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취기와 함께 달밤의 경주 릉에 오른다. 밤이 깊자 공윤희의 집까지 따라오게 된 최현 교수는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을 보게 된다. 중국의 고시가 한 줄 쓰여 있다. “사람이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다음날 찻집에 다시 가보니 사라졌던 춘화가 붙어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그 춘화를 감상한다. 공윤희가 다소곳이 차를 따르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풍경소리에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장률 감독의 ‘경주’는 2시간 25분에 이르는 다소 긴 호흡의 영화이다. 특별히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지극히 조용한, 한 남자의 1박 2일 경주체류담을 담고 있다. 그 남자는 처음엔 손에 담배만 들고 주위를 관찰할 뿐이다. 경주에서 여자후배도 만나고, 경주사람도 만나고, 공자의 후손인 찻집 주인도 만난다. 그리고 자기 눈앞에서 만났던 사람이 죽었다는 뜻밖의 이야기도 듣게 되고, 전날 보았던 사람이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듣게 된다. 장률 감독의 ‘경주’는 귀신을 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한 듯, 과거에 매몰된 듯, 현재에 불안한 한 남자의 기묘한 일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술집에서 북한학 교수와 나누는 대화에서는 이른바 먹물이 펼치는 블랙코미디를 만끽할 수 있고, 릉(陵) 위에서의 한담을 통해 고루한 역사의 덧없음을 느끼게 된다.
먹물교수의 어설픈 로맨스로 보자면 이 작품은 분명 유쾌한 코미디이지만, 등장하는 인물의 표현되지 않은 속사정과 과거를 유추해본다면 이 영화는 인간본성의 비극,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작품이다. 특히나 죽음이 곳곳에 늘려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경주의 릉에서 한적한 시골길의 교통사고에 이르기까지.
박해일이 신민아의 집에서 본 그림은 중국의 현대만화의 시조라고 평가받는 풍자개(豊子愷,펑쯔카이)의 작품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중국전통 민화에 서구식 카툰의 느낌이 든다. 초승달의 달빛이 교교히 비치는 주루(酒樓), 객이 떠난 빈 술상이 허전한 풍경이다. 그림 한 편에는 ‘人散後 一鉤新月天如水。’라는 시구가 쓰여 있다. 북송시대 사일(謝逸)이라는 문장가의 글(詞)이다. 원문을 찾아보니 '新'대신 '淡'자가 쓰여 있다. 이 영화는 박해일만 따라가며, 보며, 느끼면 된다.
장률 감독은 영화감독이 되기 전 연변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재직했었다. (by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