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한국시각) 오전에 열리는 제 87회 아카데미 영화시상식에 ‘아메리칸 스나이퍼’, ‘버드맨’, ‘보이후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미테이션 게임’, ‘셀마’, ‘사랑에 대한 모든 것’, ‘위플래쉬’ 등 모두 8편이 최우수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작품상과 함께 감독상(모튼 틸덤), 남우주연상(베네딕트 컴버배치), 여우조연상(키이라 나이틀리), 각색상, 편집상, 미술상, 음악상 등 아카데미 8개 부문 후보에 오른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펼쳤던 암호해독 작전의 실체를 다룬다. 당시 독일군의 유보트 공격으로 연합군의 배들은 대서양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런 전황을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독일군의 암호를 중간에 가로채어 독일군 작전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그야말로 ‘지피지기면 백전불퇴’였다. 독일군의 암호는 에니그마로 알려졌고 그 암호를 해독한 사람은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다. 에니그마를 둘러싼 숨 막히는 첩보전은 이미 몇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었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이번 영화는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재연하고 있다.
앨런 튜링은 1912년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고 당연히 캠브리지에서 수학교수가 된다. 전쟁이 나자 그의 수학적 재능은 영국군을 위해 사용된다. 당시 많은 수학자들이 영국군 비밀기지 블레츨리파크에 배속된다. 말이 비밀기지이지 여느 대학 캠퍼스 같았다. 앨런 튜링은 이곳에서 수많은 수학자, 언어학자, 기술자들과 함께 독일군 암호 해독을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앨런 튜링이 캠브리지 시절에 올인한 수학적 난제 중의 하나는 ‘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란 것이었다. 앨런 튜링은 여기에 ‘만능기계’의 개념을 제시한다. ‘컴퓨터’가 개발되기 전에 ‘컴퓨터’란 것의 개념과 그 작동방식에 대한 선구자적인 논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앨런 튜링이 만든 엄청난 크기의 ‘계산기계’를 볼 수 있다. 물론 빌 게이츠가 태어나기도 전, 인텔이 칩을 만들기 전, 스티븐 잡스가 맥을 만들기 훨씬 전의 일이다.
독일군 암호체제인 애니그마의 작동 원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독일군에서 ‘애니그마’라는 기계를 통해 ‘문장’을 입력하면 그것이 애니그마 속 장치를 통해 일정한 원칙에 따라 암호화되어 모스 부호로 전송된다. 받는 쪽(대서양 속 유보트 잠수함에 있을) 암호병이 그 부호를 수신하여 역순으로 ‘애니그마’의 문장을 정열, 해독하면 된다. 문제는 애니그마 속 장치(‘링’과 ‘스테커’로 구성된)가 독창적이고 정교한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 기계의 사용자는 내부구조를 전혀 알 필요가 없다. (마치 지금의 컴퓨터 사용자가 케이스를 뜯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듯이!) 암호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사전에 암호 키와 순서의 조합 등에 대한 정보만 있으면 된다. 만약 모른다면 매일같이 변하는 암호의 순서, 그리고 산생되는 엄청난 결과물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독일군은 수시로 그 ‘조합의 경우’를 바꾼다. 만약 가능한 수를 다 집어넣어 계산한다면 “오늘 공격하라”라는 문장을 ‘2천만 년 후’에나 풀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앨런 튜링은 자신의 ‘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와 ‘만능기계’를 결합한 암호해독 기계를 만드는데 ‘올인’한다. 물론, 지금 와서 보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 짓’이었다. (그 경우의 수란 것이 매 24시간마다 1,590억의 10억 배의 경우가 생성된다고 한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매력적인 연기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섹시한 배우 컴버배치는 천재들이 가지는 광기의 모습과 함께 동성애자의 섬세함(?)을 보여준다. 그 시절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추악한 외설’일 뿐만 아니라 범죄에 해당했다. 적어도 1967년에 그런 법안이 공식 폐기되기 까지는 말이다. 튜링의 동성애적 경향은 셔본 기숙사 시절 크리스토퍼란 친구와 보낸 ‘낭만적 우정’에서 눈치챌 수 있다. 그 해 방학 결핵으로 죽은 크리스토퍼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만능기계’에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러하듯 앨런 튜링도 수학에 대한 몰입,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집착이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반드시 숨겨야만할 ‘동성애적’ 고뇌도 있었을 테니. 앨런 튜링의 최후는 그의 모든 극적인 삶의 총화이다. 그의 집에 도둑이 들었고 그 수사과정에서 동성애자였음이 드러나고, (화학적) 거세형을 받게 된다. 그리곤 의기소침하여 자살한다. 독극물이 든 사과를 베어 먹고 말이다. 그렇게 한 입 베어 먹은 사과와 애플로고의 관계에 대한 속설이 탄생했다. 살아생전 앨런 튜링은 자신의 업적에 대한 영광을 제대로 누리진 못했다. 블레츨리파크에서의 위대한 성과는 오랫동안 군사기밀로 분류되었고, 컴퓨터의 개발/진화에 끼친 그의 논문과 창의력은 다른 사람의 빛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동성애자라는 딱지가 큰 장막이 되었을 것이다.
튜링이 죽기 얼마 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사고를 지배하는 수학적/언어적 논리와 동성애에 대한 강박관념이 녹아있는 유명한 문장이 있다.
튜링은 기계가 생각한다고 믿는다
튜링은 남자와 동침한다
그러므로 기계는 생각하지 못한다
영화제목 ‘이미테이션 게임’은 전쟁이 끝난 뒤 1950년에 발표한 논문 ‘계산기와 지능’에 등장한다. 컴퓨터의 지능에 대한 개념과 생각들, 논란이 쏟아질 때 “기계가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튜링의 생각이 녹아있다. 튜링은 ‘이미테이션 게임’(흉내게임)이란 개념을 이야기한다. 앨런 튜링을 다룬 책 중 최근 한국에서 출판된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 - 앨런 튜링과 컴퓨터의 발명’(데이비드 리비트 지음/ 승산 출판사)에 ‘이미테이션 게임’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남자A와 여자B가 있고, 질문자C가 있다. C는 남자일수도 있고 여자일수도 있다. 각기 다른 방에 있는 A와 B에게 C가 각각 질문한다. C가 던지는 적절한 질문과 혼란을 야기하는 A와 B의 응답을 통해 A와 B의 성별을 알아내는 것이 이 게임이다. (물론 A와 B의 목소리나 외모로 성별을 알 수 없게 통제한다) C가 A보고 “너 여자지?” 했을 때 A가 “예”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오”라고 할 수도 있다. 참을 말할 수도 있고,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사람이니까. 앨런 튜링은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한다. 기계에게 A역할을 맡긴다면?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2002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뷰티풀 마인드’에서 러셀 크로우가 맡은 역할도 천재수학자 존 내쉬였다. 존 내쉬는 ‘죄수의 딜레마’로 알려진 ‘내쉬 균형’ 개념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었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오늘 개봉된다. 15세관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