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의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김일성이 회담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죽는 바람에 회담은 무산되었다. 그런데 정말 회담이 열렸다면 어떤 대화가 오고갔을까. 우리가 잘 아는 ‘정치9단’ YS가 주체사상의 총화 김일성을 상대로 제대로 회담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아마도 당시 청와대와 안기부(국정원의 전신)는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했으리라. 그중에는 이런 시나리오도 있음직하다. 연기 잘하는 배우하나를 아예 김일성대역으로 삼아 철저한 준비를 했으리라. 김일성대역은 먹고 자고 말하는 모든 일상을 진짜 김일성같이 생각하고 행동했으리라. 캐릭터에 빙의되어 정말 자신이 김일성인 것으로 착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회담은 무산되었고, 이 김일성에 빙의된 배우의 나머지 삶은 어찌될까. 이 기발한 상상력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바로 설경구 주연의 ‘나의 독재자’이다.
어제 서울 자양동 롯데시네마 건대점에서는 ‘나의 독재자’의 기자사시화가 진행되었다. 놀라운 상상력의 정치풍자드라마 ‘나의 독재자’ 상영이 끝난 뒤 이해준 감독과 주연배우 설경구, 박해일, 윤제문, 이병준, 류혜영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천하장사 마돈나’와 ‘김씨표류기’ 등 범상치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데 신기한 재주를 보여준 이해준 감독은 이 영화를 “먼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으로 배우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아버지가 겪어왔던 시간의 무게를 표현하고 싶었고, 영화 연출을 하면서 배우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며 연출 의도를 전했다.
영화 ‘나의 독재자’는 대한민국 한복판에 자신을 김일성이라 굳게 믿는 남자와 그런 아버지로 인해 인생이 풍비박산난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설경구는 1974년 유신선포를 앞두고 첫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을 위해 안기부에 전격 캐스팅된 연극배우 김성근 역을 맡았다. 설경구는 "김일성 대역 역할이라는 점이 재미있었다. 영상을 참고하며 손동작을 많이 연습했고, 현장에서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다"며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를 향한 애증을 가진 백수건달 아들 ‘태식’ 역으로 분한 박해일은 "촬영 전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설경구 선배가 실제 저희 아버지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 아버지처럼 믿고 따를 수 있었다"며 연기호흡을 이야기했다.
회담 리허설을 기획하는 중앙정보부 ‘오계장’ 역을 맡은 윤제문은 "악역을 하면서 스스로 악역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다. 그저 그 인물에 충실할 뿐이다. 오계장 역시 그 시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고, 열심히 살았던 인물이다"라며 극 중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전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메소드연기를 앞세워 무명연극인 김성근을 ‘김일성’으로 완전 빙의시키는 '허교수' 역을 맡은 이병준은 "일반적으로 연극배우들은 석 달 전부터 성격 분석을 한다. 걸음걸이, 습관 등을 연구하고, 끝나고 나서도 '왜 내가 더 잘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며 실제 작품 속 캐릭터에 들이는 정성을 소개해주었다.
한편 어제 저녁에는 전도연, 정재영, 유연석, 박유천,김재중, 강혜정 등 배우와 이창동 감독, 이준익 감독, 김지운 감독, 장준환 감독, 허진호 감독 등이 참석한 가운데 VIP시사회가 열렸다.
유신시대를 거쳐 통일시대로 가는 길목에 있음직한 역사적 뒤안길을 담은 영화 ‘나의 독재자’는 이달 30일 개봉된다.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