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제는 작은 표지석으로만 남아있는 서소문. 그런데 이 서소문이 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서울의 4소문 중의 하나였던 서소문은 조선시대에 중죄인을 처형하던 형장이었다. 또한 이곳은 44명의 순교 성인들이 배출된 우리나라 최대의 천주교 순교성지이기도 한데... 조선 후기 잃어버린 100년의 역사를 되짚어보기 위해 사라져버린 서소문으로 역사여행을 떠난다.
프랑스에서 온 사제들과 함께 하는 서소문으로의 역사여행
한국에 온 지 올해로 40년이 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임경명 신부. 프랑스인이지만 사제 인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낸 그가 서울 도심 속으로 역사탐방에 나선다. 몇 달 전 새로 부임한 베트남 출신의 유덕신 신부와 함께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배우고 되짚어보기 위한 것. 서소문 밖 처형장이 있던 곳과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약현성당 등 조선 후기 천주교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들을 방문한 이들의 소감은 어떨까?
서소문에서 이뤄진 피의 순교
서소문 공원의 순교자 현양탑에는 서소문에서 처형된 순교 성인 44명과 하느님의 종 2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중에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과 조카인 정하상도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다산 정약용 家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다. 그 중 정약종 가족은 부부와 정하상을 비롯한 세 자녀 모두가 서소문 일대에서 처형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족보에서도 그 이름마저 지워져야 했다. 정약용 家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역사의 중심에 서소문이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과 교황의 방한
일제 강점과 더불어 서소문이 철거되면서 서소문의 역사는 잊혀졌다. 하지만 사라진 서소문은 1984년 극적으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식으로 서소문에서 순교한 사람들 중 44명이 성인이 되었던 것. 그리고 30년 만에 다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다. 서소문을 비롯한 광화문 일대가 시복식 장소로 정해졌고, 각계에서도 서소문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서소문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되새겨본다.
방송일시 : 2014년 8월 12일(화) 밤 10시 50분- KBS 1T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