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9일) 오후, 외국인 관광객이 늘 붐비는 서울 명동에 위치한 롯데 애비뉴엘 극장에서는 ‘하이브리드 애니메이션’이라는 설명을 단 영화가 한 편 상영되었다. ‘융’ 이라는 이름의 영화감독의 애니메이션 ‘피부색깔=꿀색’이라는 작품이었다. 75분의 영화상영이 끝난 뒤 감독과의 기자간담회가 진행되었다.
영화 ‘피부색깔=꿀색’은 1970년 시장 통에서 길을 잃은 한 아이가 고아가 되어 고아원과 홀트아동복지회를 거쳐 이국만리로 입양되어간 감독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 5살 정도였던 소년의 이름은 ‘전정식’이었고, 벨기에 입양되어서는 ‘융’이라 불렀다. 이미 자식이 네댓 명은 되는 벨기에의 중산층 가정에 입양된 ‘융’은 한동안은 자신을 내버린(!) 한국을 싫어했지만 성장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차 아시안 문화에 빠져든다. 그리고는 점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제 40 중반의 나이가 된 융은 한국을 사랑하게 된다.
융(전정식) 감독은 현재 불어권에서 판타지 만화작가로 활동 중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래픽노블로 먼저 발표했고, 이를 로랑 브왈로 감독과 함께 애니메이션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이 작품은 작년 부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었다.
서구선진국 벨기에답게 다섯 살 소년은 입양되는 그 순간부터 가족비디오의 영상에 남아있다. 융 감독은 가족비디오와 한국을 다룬 기록필름, 다 큰 뒤 다시 찾은 한국풍경을 적절히 섞어 한편의 애니메이션으로 완성시켰다.
영화제목 ‘피부색깔=꿀색’에 대해 감독은 “유럽에서는 아시아이라면 일단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피부색은 당연히 노란색으로 표기한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입양서류를 작성해준 분은 피부색을 꿀색이라고 표현했다. 볼 때마다 아름답고 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분 덕택에 이 영화를 위해 다른 제목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꿀색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영화에서는 한국전쟁과 1960년대 한국사회의 모습을 스치듯 보여준다. 그리고 서구인의 품에 안기는 한국의 고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왜 한국이 많은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 보냈어야했는지 역사적 맥락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혼혈아들이 미국으로 많이 입양됐다. 60~70년대에도 여전히 극심한 가난을 겪었고 가난과 한국 특유의 핏줄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문화,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입양을 시킨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한 입양실태를 영화를 통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전 감독은 자신, 그리고 많은 고아들을 타국에 내보낸 조국이 원망스러웠던 때가 있었단다. “어렸을 때는 왜 이리 많은 아이들을 입양 보내야 했는가에 대해 내가 태어난 나라 한국에 굉장히 화가 났다. 그 때문에 한때 일본문화에 심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태어난 나라를 부정하면 할수록 불행하다는 것을 깨닫고, 내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도 내 뿌리인 한국을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뒤 비로소 평화로워질 수 있었고 지금은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어린 소년이 핫소스에 음식을 비벼먹으며 속 쓰려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은 “그것은 한국인으로서 자연스럽게 매운 음식에 끌렸고, 또 하나는 청소년시기에 나 자신을 파괴시키는 의도였다.”고 말한다. 전정식 감독은 지금은 한국음식을 너무 좋아한단다. 자연스럽게!
융 감독은 자신의 어두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펼쳐놓았다. 그는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한국의 생물학적 어머니에 대한 생각도 털어놓았다. “”영화에서 나의 (양)어머니와 생물학적 어머니 두 분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다. 나는 유럽문화와 한국문화의 사이에 있거나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인과 한국인으로서의 자아를 연결하는 과정을 그리고자 했다. 입양인을 희생자로 묘사하지 않으려 했고, 이 영화로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거나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본 벨기에의 가족들이 고마워했다는 융 감독은 “단지 개인사를 완곡하게 담으면서 보편적인 정서를 담았기에 모두들 공감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 융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 뒤 많은 입양단체와 입양되었던 한국출신들에게서 자신의 처지를 잘 그려주었다는 감사의 이 메일을 많이 받았다고 소개했다.
영화 마지막에는 작품 내용을 압축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감독의 딸 알리아(18)가 불렀단다. 20년 전 만난 또 다른 한국 입양인과 결혼해 얻은 딸이란다.
이 작품은 세계 80개 영화제에 초청돼 23개 상을 수상했다.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상영 중이며 내달 16일에는 뉴욕 UN본부에서 특별상영회가 열릴 예정이다. 한국개봉은 ‘입양인의 날’(5월 11일)을 앞두고 8일 개봉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