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라디오 피디가 팝 역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불세출의 ‘기타리스트 105인’에 대한 단행본을 내놓았다. 748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책에는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대단한 기타리스트의 이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현재 매일 저녁 6시부터 2시간동안 <<강수지의 메모리즈>>라는 음악프로그램의 연출을 맡고 있는 정일서 피디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이미 <<365일 팝 음악사>>(904쪽)와 <<팝 음악사의 라이벌들>>(456쪽)이라는 ‘오직’ 팝에 관련된 두 권의 ‘두꺼운 책’을 낸, 이 분야의 공인된 전문가이기도 하다. 라디오 음악PD로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음악만 듣고, 음악방송만 한 사람이다. 음악이 좋아서 결국은 음악과 함께 살고 있는 정일서 피디는 꾸준히 ‘음악’에 관련된 책을 내고 있는데, KBS 라디오피디는 어떻게 팝음악을 사랑하게 되었고 어떻게 팝음악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을까.
더 뮤직 마니아
정일서 피디 또한 다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 디제이가 자리잡은 유리부스가 있는 음악살롱에 대한 정서도 갖고 있고, LP판과 음악CD를 사 모으는데 아낌없이 투자하고, 특별한 음악자료를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그런 마니아의 궤적 말이다. 그러다가 라디오 음악방송 피디가 되었으니 가장 행복한 직업을 갖게 된 케이스일 것이다.
더 기타리스트
정일서 피디는 세 권의 두툼한 책 이외에도 다른 라디오피디들과 함께 << KBS FM 월드뮤직 - 음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동료, 선후배 음악피디들이 힘을 합쳐 지역을 쪼개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 책이다. 정일서 피디는 이 책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켈틱과 북유럽음악>> 편을 맡았다. 음악과 함께 음악을 다룬 책에 대한 또 다른 애정을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다.
정 피디는 자신의 신간에 대해 “쉽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전에 낸 책은 내가 직접 아이디어를 낸 책인데 이번 책은 출판사에서 먼저 집필의뢰가 들어왔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기타리스트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은 나보다는 기타를 잘 아는 사람이 해야 될 것 같아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그런데 한 달 쯤 뒤 다시 부탁하더라.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고 출판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마도 출판사는 그간 정 피디가 낸 책과 현재 맡고 있는 음악 프로그램에 대한 소문을 충분히 들었고 그 실력을 확인했으리라. 정 피디는 그날 이후 더 열심히 자료를 찾고, 음악을 듣고, ‘기타리스트’를 채워나갔다.
“이 책은 알고 있는 것을 쓴 책이라기보다는 내가 공부하며 쓴 책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를 바탕으로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뽑아본 것이다." 그가 그렇게 1년여를 매달린 끝에 작년 10월, 마침내 <<더 기타리스트>>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에는 장고 라인하르트부터 존 메이어에 이르기까지 팝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기타리스트 105명이 수록되어있다.
“105명은 직접 고른 것이다. 활동시기 등을 중심으로 시대 순으로 엮었다. ‘롤링 스톤’같은 외국의 유명음악잡지와 ‘기타닷컴’ 같은 사이트 등에서 해마다 나오는 순위자료로 참조했다.”
정 피디는 당초 록 기타리스트만을 다룰 생각이었지만, 록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블루스, 록과 재즈의 접점인 퓨전 재즈와 재즈 록 계열의 기타리스트를 두루 살피며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매번 마주치는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장고 라인하르트였다. ‘장고’에게 영향을 받은 후대의 기타리스트가 누구냐고?
"너무 많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이름이 거론될 것이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기타 연주 방식을 만들어내었고, 그것을 세상에 퍼뜨렸다.“고 소개한다.
장고 라인하르트는 음악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록 기타리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정 피디는 이 사람을 제일 앞자리에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1910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장고 라인하르트는 열여덟 살 무렵 집에 불이 나서 다리와 왼손에 화상을 입었다. 결국 왼손가락 2개를 절단하는 치명적인 장애를 입었지만 최고의 재즈 기타리스트로 우뚝 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재즈와 블루스의 탄생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하고, 록큰롤 비트가 폭발하는 공연장 제일 앞자리에 앉아있는 것 같다. 록과 포크가 공존하던 시절을 지나 사이키델릭과 프로그레시브 록이란 것을 맛보기도 한다. 시대가 흐르면서 하드 록과 헤비메탈도 한 시대를 풍미했었다. 그 모든 진화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기타의 전설들이 이 책에 등장한다. 미친 듯한 몸놀림과 손가락으로 음악 마니아들로 하여금 천국과 지옥을 오고가게 한 그런 기타주법을 완성시킨 ‘더 기타리스트’들이다.
“개리 무어는 외국에선 순위권에 잘 오르지 않는 기타리스트이지만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더 기타리스트’에서 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정 피디는 넣어야할 기타리스트를 빠트린 실수도 저질렀단다. “스티브 바이! 이 양반이 빠지면 안 되는데. 원고를 준비할 때 명단에는 분명 있었다. 당연히 쓴 줄 알았는데 책을 내고 나서 누군가가 그러더라. 스티브 바이가 빠졌다고. 그럴 리가 있나하고 보니 정말 없더라.”며 아쉬워했다.
<<더 기타리스트>>에는 기타리스트들이 선사하는 화려한 선율이 매 페이지에서 살아있다. 그들이 어떻게 기타라는 악기에 심취하게 되고, 기타 줄에 목을 매고, 기타를 영원히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보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장고 라인하르트를 지나면 초기 블루스의 거장 비비 킹을 만날 것이고, 곧이어 록큰롤의 개척자들인 척 베리와 헤비 메탈의 시조인 딕 데일을 만나게 된다.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과 ‘기타의 신’ 에릭 클랩톤, 지미 핸드릭스와 제프 백의 기타 선율이 귓가에 맴돌지 모른다.
그렇게 지미 페이지, 리치 블랙모어, 산타나, 라이 쿠더, 마크 노플러, 개리 무어, 애드워드 반 헤일런, 더스턴 무어, 잉베이 말름스틴 등 기라성 같은 기타리스트를 만나게 된다. 물론, 시대를 거슬러 보아도 되고, 아무 페이지나 집어서 읽어도 음악에 도취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정 피디의 책은 이들 위대한 기타리스트의 생평(生平)과 음악사적 성취, 그 거대한 영향력을 일필휘지로 소개하고 있다.
최고의 록 기타리스는 누구?
"록 음악에 있어, 기타의 역사에 있어, 그 위대함을 이야기 하자면 지미 헨드릭스를 으뜸으로 쳐야하지 않을까요? 그 동안 많은 책과 잡지에서, 관련 사이트에서 수많은 리스트를 뽑았었는데 지미 헨드릭스가 언제나 탑 오브 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겠죠?"
지미 헨드릭스는 1942년에 태어나서 1970년 스물일곱의 나이로 ‘그야말로’ 요절한, 영원히 뒤바뀌지 않을 넘버원 기타리스트이다. 책에서는 “활화산 같은 에너지와 번뜩이는 창의력으로 충만한 그의 연주는 짧은 시간 안에 록 팬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획득했다”고 소개한다. 지미 헨드릭스의 스테이지 매너와 쇼맨쉽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연주기법과 스테이지에서 보여주는 광적인 모습은 수많은 후배 기타리스트에게 절대적 영감을 주었다.
정일서 피디는 기타를 얼마나 칠까. "뭐, 그냥 남들 치는 것처럼. 배워본 수준이에요."라고 말을 흐린다. 그런데 그도 학창시절 ‘그룹사운드’ 활동도 했고 군대도 '문선대' 출신이란다. 함정은 그의 밴드 내 포지션이 기타가 아니라 건반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더 기타리스트'를 집필하는 데는 기타실력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귀와 음악을 사랑하는 가슴이 먼저일 것이다.
KBS 라디오 음악피디 정일서
정일서 피디는 1995년 KBS 라디오 피디로 입사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그 때부터 라디오 피디가 되고 싶었다. 신방과 나왔고. 라디오 피디란 미래의 꿈에 대해 흔들려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KBS에 들어온 후 처음 맡은 라디오 프로는 시사프로그램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라는 아침 시사프로그램의 AD였다. 그리고 2FM의 “황정민의 FM대행진”의 AD로 음악프로를 처음 맡았다. 그의 PD입봉 프로그램은 2000년 ‘남궁연의 뮤직스테이션’이었다.
정 피디가 그동안 맡았던 음악 프로그램의 제목만 나열해도, KBS에는 참 많은 음악 프로그램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황정민의 FM 대행진(1999) - 남궁연의 뮤직스테이션(2000) - 이금희의 가요산책(2001) - 김광한의 골든 팝스(2002) - 전영혁의 음악세계(2002) - 이상은의 사랑해요FM(2003) - 신화 이민우의 자유선언(2004) - 유희열의 라디오천국(2009~2010) -강수지의 메모리즈(2013~)
지금은 ‘강수지의 메모리즈’를 담당하고 있다. 이 시간은 최근까지 이소라(가수)가 진행했었다. 작년 봄 개편에서 이소라가 다시 라디오 디제이로 돌아와 관심을 모았는데 아쉽게도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하고 강수지가 마이크를 이어 받았다.
정 피디는 “강수지는 기본적으로 본인이 라디오를 좋아하고. 라디오 DJ를 하고 싶어 한다. 그게 중요하다. 연예인들 중에는 바쁜데 억지로 라디오 디제이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보다는 자기가 정말 좋아서 해야 오래할 수 있다. 라디오 디제이는 오래 해야 한다. 강수지는 기본적으로 라디오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 첫 번째 조건은 충족된 셈이다. 그리고 성실하다. 데뷔 이래 가져온 순수한 이미지도 여전하다. 우리 또래 4~50대 타깃 프로그램의 매력 있는 디제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 피디는 라디오 음악프로의 PD로 나름의 철학을 가졌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의 힘은 음악에서 나온다. 물론 진행자가 누구인지도 중요하다.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도, 이런 것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강점이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프로그램은 디제이의 인기만 가지고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 디제이가 그만 두면 그 프로는 날아간다. 디제이가 바뀌어도 프로그램의 정체성, 그 음악은 남아야한다. 지금 하는 프로그램도 같은 원칙에서 방송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프로그램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음악을 많이 내보내고. 게스트도 없다. 음악만 가지고 방송한다.”
정일서 피디가 연출을 맡은 ‘강수지의 메모리즈’에서는 어떤 음악이 주로 전파를 탈까. “음악들은 제가 고르죠. 날씨나 그날의 사건에 맞게, 작가의 원고에 부합되는 곡을 고르기도 하고.” 이런 말을 하던 정 피디는 생방송에 대한 소신을 밝힌다. “라디오는 기본적으로 생방이어야 한다. 녹음보다는 생방일 때 라디오의 매력이 극대화된다. 청취자와의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 진다. 청취자가 신청곡을 올리면 바로바로 그 음악을 틀어주고...”
그래서 정 피디는 라디오 스튜디오에 갈 때 선곡표의 일부분만 채워간다고. 분위기에 맞춰, 청취자들의 반응을 보고 나머지 음악을 채워나간다. “청취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게 청취자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가 진행된 전날 ‘강수지의 메모리즈’를 통해 방송된 노래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Take it easy”(이글스), “편지”(김광진), “Somewhere There's A Someone”(딘 마틴), “Spanish Coffee”(프랭크 밀스) 등이란다.
Video Killed Radio Star?
정일서 피디는 라디오라는 미디어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기본적으로 라디오는 이제 과거와 같이 굉장히 영향력 있는 매스미디어로 기능하던 시대는 지났다. 라디오에 나온다고 해서 크게 화제가 되는 경우도 없다. 과거에 비해 라디오 채널도 많아졌다. DMB오디오채널도 생겨났고, 개인별 인터넷라디오와 위성을 이용한 라디오도 생겨났다. 정말 채널이 많아졌다.”
“옛날처럼 불특정 다수의 청취자를 위한 두루뭉술한 프로그램보다는 타깃을 명확히 해야 한다. 어필하고자 하는 청취층을 분명히 잡아야할 것이다. 청취자들이 골라서 듣는 라디오방송의 시대로 이미 접어들었고 이제 그런 경향이 강화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정 피디는 “라디오는 매스미디어가 아니라 스몰미디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틀어주는 방송을 찾아듣는 기호형 스몰미디어이다.” 그런 ‘기호형 스몰미디어’ 시대의 미래는 어떨까. “우리 때는 10대들이 라디오를 끼고 살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요즘 라디오 청취율을 올리려면 40대, 50대 중장년층을 타킷으로 해야 한다. 갈수록 매체가 올드해지고 신규 청취자가 없어진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클 것이다. 라디오 피디들이 요즘 갖는 고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정 피디는 “옛날처럼 매스미디어로서의 기능은 줄겠지만 너무 올드해져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매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항상 찾는 사람은 있다. 그 개인적이고 따뜻한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유지되어 갈 것이다.”고 낙관한다.
기타리스트로 본 팝 역사 ‘더 기타리스트’
다시, 정일서 피디의 신간 <<더 기타리스트>>로 화제를 돌렸다.
“이 책은 기타리스트의 이야기이지만 꼭 기타리스트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기타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음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이전에 낸 책 <365일 팝 음악사>>와 <<팝 음악사의 라이벌들>>처럼 팝 음악사를 다룬 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다 볼 필요는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를 찾아보든지 한 부분만 생각날 때 찾아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정 피디는 책의 두께와, 105명이라는 장중함에 부담갖지 말라고 당부하며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허영만의 <<고독한 기타맨>>에 매료되어 기타를 배웠거나, 잉베이 말름스틴의 신들린 기타연주에 빠졌거나, 장고 라인하르트가 누군지 궁금하다면 정일서 피디의 <<더 기타리스트>>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페이지마다 위대한 기타리스트들이 연주하는 파도 같은 쇳소리와 함께 열광하는 매니아의 함성소리가 손가락사이로 마구마구 삐져나오는 책이다.
정일서 피디의 <<더 기타리스트>>는 작년 가을 출간되어 예술대중문화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교보문고, 예스24 등 각종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화제의 책, 올해의 책, 인기도서에 선정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박재환, 2014.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