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 작가는 유쾌하고, 따뜻하다. 다양한 감성이 맛있게 버무려진 듯한 샐러드 같은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왔던 그는 라디오 DJ로 활동하며 출근길에 썼던 글들을 엮어 신간 에세이 '빈틈의 온기'를 완성시켰다.
'빈틈의 온기'는 윤고은 작가가 출근길에 발견한 일상을 그린 작품이다. 몸을 실은 열차 속에서 포착한 삶의 진솔한 이야기와 상상력을 통해 그려낸 세계가 담긴 이 신간은 윤고은 작가만의 위트로 가득 채워져 있다. 출근길의 웃기면서도 슬픈 상황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과 설렘,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시간 등 우리의 일상에 녹여진 따뜻한 온기를 세세히 수집한 기록은 독자의 일상과 상상의 경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Q. 출근길의 풍경이 담긴 에세이 '빈틈의 온기'를 쓰려고 계획한 계기는 무엇인가?
라디오 진행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스튜디오가 일산에 있고 집은 분당 끝이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 왕복 거리가 꽤 멀다. 출근길에 느끼는 단상을 휴대폰에 적어서 그 날 라디오 방송에서 읽어주는 것을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지하철을 탔을 때 보는 모든 풍경들을 보고 썼고 그 과정이 재밌었다. 그 글이 엮여서 '빈틈의 온기'가 됐다.
Q. 라디오 DJ라는 직업이 작품 구성에 한몫했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 속에서 라디오 DJ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들도 흥미로웠는데, 특히 소리로 인해 도둑과 라디오 DJ를 직업적으로 비교하는 부분에서 폭소를 터뜨렸다.
클래식 방송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라디오 DJ가 휴대폰 진동이 울린 상황에 진지하게 사과를 했다. 내가 라디오 DJ를 해보니 알 것 같았다. 옷도 부스럭대는 소재가 있다. 단추나 귀걸이는 짤랑거리는 소리가 유독 들리는 재질이 있다. 라디오를 하면서 알게 된 소리다.
Q. 라디오 DJ 이야기처럼 '빈틈의 온기' 속 모든 이야기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상황들에 관한 것이다. 출근길에 지각을 하는 상황을 유쾌하게 표현한 글도 마찬가지다. 윤고은 작가만의 유머가 담겨 있다.
황당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자아가 상황에서 멀어져 거리 두기를 하는 느낌이다.(웃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망하더라도 기가 막히게 망하는 날이 있다. 하지만 하루 지나면 새로운 망함이 온다. 정신없고 바쁜데 이 모든 망함을 헤아릴 수 없다.(웃음)
Q. (웃음)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의 유머가 웃기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상황을 겪는 사람이 혼자만은 아닌 느낌에 더욱 공감하게 되는 것 같다.
꼬이는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재밌다. 나는 나로만 살아봐서 평균치는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에 그런 일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민망한 상황이지만 나는 이런 순간을 공유하는 것을 좋아한다.(웃음)
Q. 작품 속의 또 한 가지 재밌는 포인트를 짚어내자면, 1번 윤고은부터 9번 윤고은까지의 존재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자신을 해부하고 다양한 자신의 모습들을 번호를 매겨 전시하는데, 그 과정이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편집자의 아이디어였다. 자신에게 번호를 매기는 윤고은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쓴 원고 중 하나였다. 사람은 여러 면을 가지고 있다. 일찍 일어나는 5번은 제일 먼저 탄생한 존재다. (그런 5번을 억압하는 다른 자아들 때문에) 가장 짧은 시간을 사는 존재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5번, 9번 밖에 없었다. 편집자가 나머지 번호들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도 재밌을 것 같다고 하셔서 내 삶을 돌아봤다. 그렇게 1번 윤고은부터 생각했다. 1번은 가장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방향을 발견하지만 추진력은 없는 아이. 호기심은 많은데 게으른 존재가 1번이다. 이런 식으로 차차 구성했다.
Q. 그렇다면 지금 이 인터뷰 자리에는 몇 번의 윤고은이 나왔나?
최근에 책 내고 나서 10번이 새로 생겼다.(웃음) 후반 작업을 하는 자아가 있다. 기자님을 잘 알고 지내다 보니 사실 이 자리에 10번만 나와있는지는 모르겠다. 뒤섞여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5번은 못 왔다는 것이다.(웃음)
Q. 번호를 매기는 행위는 재밌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일인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 안의 다양한 모습을 교차하며 보여주고, 때로는 감추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나?
외출하기 위한 외출복과 실내에서 편안하게 입는 실내복이 있는 것처럼, 모습을 바꾼다는 것에 '옷을 갈아입는다' 정도의 의미만 부여해도 될 것 같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 정도의 마음, 그 과정에서 자괴감을 느끼진 않는다. 그저 기능적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즐기는 차원으로 생각한다면 모습을 바꾸는 것이 슬픈 일만은 아닐 것이다.
Q. 마음에 와닿는 말이다. 사실 '빈틈의 온기'는 마냥 웃기기만 한 작품도 아니다. 작가의 마음처럼 일상의 소중한 존재들을 어루만지는 온기 어린 부분들도 포착된다. 그중에서도 '좋은 밤 보내'라는 말에 담긴 따뜻한 의미를 짚어내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
마지막까지 고심해서 넣은 이야기다. 내 개인적인 것들을 드러내는 에세이긴 하지만, 수위 조절을 해야 했다. '사람들이 이런 것까지 궁금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우 낯선 공간에 갔을 때 혼자 잘 자지 못한다. 밤 자체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면이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턴 다운 서비스나 '좋은 밤 보내'라는 말이 더욱 와닿았다. 독자들의 반응을 들으니 이 부분에서 위안을 받은 적이 많은 것 같았다.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Q. 사실 '좋은 밤 보내'는 대화를 마무리하는 형식적인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설레고, 두근대는 말로도 읽힐 수 있는 것 같다.
의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어떤 대화를 할 때 마무리 말로 많이 쓰이는 말도 곱씹어보면 좋은 뜻이 숨어있는 말이다. 누군가는 무난한 마무리 인사로 선을 긋는 말처럼 던졌지만,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말조차도 최대한 온 몸으로 흡수하면서 기쁨을 느낄 때가 있다.
Q. 작품 속 의미에 관한 답변을 들을수록 작가의 선한 마음과 영향력이 느껴진다.
책의 성격적인 부분에 코로나 사태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자주 가던 가게들도 폐업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못 만나고, 모든 것이 불편하고 불안하다. 나는 사람이 보통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소한 온기 같은 순간을 발견하면 그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뭉클해지고 그 순간을 수집하고자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기억들을 모으고 싶다. 삶이 생존 게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그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멈칫하게 만드는 작은 순간들, 그 시간들을 모으고 모으면 어느 정도는 삶에 보탬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Q. 감동을 파괴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티끌 모아 티끌'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모으고 모았는데 너무 양이 적으면 어떻게 하나?(웃음)
(웃음) 우주의 법칙이 합리적이진 않다. '티끌 모아 티끌'이라도 그 티끌로 삶이 어떻게 버텨질 때도 있다. 그리고 밑 빠진 독일지라도 나는 그 순간을 모으는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빈틈의 온기'에도 이러한 마음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