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피디들은 아침마다 (실시간으로) 책상 위에 놓인 전날 시청률 조사표를 받아들고 머리를 쥐어뜯는다고 한다. 요즘은 유튜브에, 넷플릭스에 시청자 다 뺏기고 남은 파이로 혈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럼 심야에 내몰린 ‘독립영화관’의 형편은 어떨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되는 영화가 오늘밤 KBS 1TV ‘독립영화관’시간에 방송된다. 지난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박한진 감독의 실험적 작품 ‘루비’이다. 보석 세공이야기가 아니라 ‘과학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국 이야기이다. 자기 작품을 만들고 싶지만 시청률과 싸워야하는 현실적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희곡) 당선작을 작가 자신(김명진)이 시나리오로 옮겼다. 방송사 피디, 조연출, 그리고 작가의 입장에서 그들이 맞부딪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담고 있다. 당연히 ‘시청률’이 악당 역이다. (방송사는 EBS도, KBS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것 같은 기시감이 들지 모른다. 아니 모든 방송사의 공통의 이야기일 것이다)
● 오! 시청률
서연(박지연 분)은 과학고를 나온, ‘과학에 대한 자존심’과 방송사 ‘피디’라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장기를 살려 현재 교양프로그램 ‘오늘의 과학’을 만들고 있다. 조연출 은지(손은지)와 작가 수오(김동석)를 데리고 매회 ‘어렵고, 난해하고, 재미없는’ 과학이슈를 대중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춘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머리를 쥐어짠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이 잘되기는 어렵다. 시청률을 떨어지고 부장은 ‘프로그램 폐지’운운하며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AI로 로또맞추기’ 같은 프로그램을 해도 될까말까일텐데 내놓은 아이템은 ‘양자역학’이다. 이건 크리스토퍼 놀란이 와도 답이 없는 '고품격 저시청률' 프로그램이 될것만 같다. 서연 피디는 조연출과 작가를 닦달한다. 대학로 연극에서 힌트를 얻어 ‘마술사’를 출연시켜 ‘어렵고, 난해하고, 재미없는’ 양자역학을 재밌게 만들려고 한다. 작가의 대본도 엎는다. ‘비둘기 사라지는 마술’은 산으로 간다. 마지막 자막 입히는 작업도 피디 마음에 안 든다. 시청률이 원수다.
방송국 사람들이 봤으면 흥미로운 영화일 듯하다. 영화는 젊은이가, 청춘이, 자신의 이상을 접어야하는 시국에 어떤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양자역학 편’의 형편없는(!) 시청률 표를 앞에 두고 서연 피디가 다시 한 번 부장과 맞선다. ‘다음엔 상대성이론’을 해 볼 것이라며. 그러고는 호기롭게 대든다. (이거 안 돼, 저거 안돼.. 구질구질 붙어있을 바에) “이번 참에 프리 나갈까요?” 그러자, 그런 울분에 찬 피디를 수백 명 봤을 부장이 그런다. “너가 나영석이냐?”라고.
● 우리가 만드는 세상, 나는 없다
영화 ‘루비’는 방송국 사정을 다루면서도 각 인물들의 입장에서 흥미로운 직장 관계도를 보여준다. 연출과 조연출의 관계, 방송국 피디와 작가의 관계 말이다. 정말 100퍼센트 프로의 세상이지만 이곳도 정글과 같은 직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도 하고, 뒤담화도 펼친다. 박한진 감독은 이들 관계의 충돌을 날카롭게 다루면서 파격적 실험을 한다. 방송국, 스튜디오 녹화세트와 연극무대를 오가면 인물의 심층심리를 파고든다. 피디와 조연출과 작가, 그리고 ‘눈이 빨개진’ 마술사(최영열)는 ‘오늘의 과학’을 녹화하면서 동시에 무대 연극을 관람하고, 직접 배우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감독은 현실의 복잡한 심사를 마치 한편의 연극같이, 똑같은 고뇌의 무게감으로 표현하려고 한 모양이다.
김명진의 희곡을 찾아보니 서연은 메인작가, 수오는 서브작가이다. 연극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마술사의 어머니’이다. 다큐멘터리작가를 했다는 김명진의 희곡, 그리고 시나리오에는 분명 방송국괴담이 포함된 게 분명해 보인다. 제목으로 쓰인 ‘루비’는 마술사가 데리고 온 ‘비둘기’이름이다.
다시, 돌아와서. 청춘은 싸우고 울부짖고 때론 주저앉으면서 전진하는 것이다. 그동안 조금 나이가 더 들 뿐이다. 아쉬워 마라. 오늘밤 독립영화관 [루비]를 볼 시간을 충분하니 말이다. 오늘밤 12시 10분에 KBS 1TV에서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