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사도’, ‘’동주‘의 이준익 감독이 조선시대 성리학자 정약전의 이야기를 흑백의 필름에 풍요롭게 담아냈다. 정약전은 한국 사상계의 명사인 정약용의 형님이자, 정조로부터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유명세로 따지자면 ‘목민심서’의 정약용에게 밀리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그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덕후 기질이 있었다니.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 정약용, 그리고 또 한 명의 형제인 정약종의 몰락으로 시작된다. 출중한 형제였던 이들은 ‘양반’이자 성리학자이며, 실학자이자 천주교 신자였다. 이들은 ‘사학’(邪學, 주자학에 반대되는 간사한 학문), 서학쟁이로 몰려 유배 당한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가게 되는 것이다.(동생 정약종은 참수된다. 순교한 것이다) 뭍길을 따라, 그리고 흔들리는 배에 실려 정약전은 이제 흑산도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임금님이 또 언제 자신을 불러줄지 마냥 기다리며, 저 멀리에서 인편으로 전해지는 동생의 편지를 기다리며 말이다.
영화는 정약전(설경구)이 흑산도에서 섬사람들과 어울리는 과정을 바다바람과 사람냄새 물씬 풍기며 보여준다. 창대(변요한)라는 총각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열길 물속 세상과 온갖 바다생물의 생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동생보다 덜 알려진 인물과, ‘자산어보’라는 훨씬 덜 알려진 생물학 서적을 이준익 감독은 생생하게 구현해 낸다. TV보다 훨씬 큰 화면에서 [역사스페셜]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인물과 물고기, 그리고 풍광을 잡아낸 것이다.
영화는 전반부 정약전과 창대의 만남을 통해 <자산어보>에 이르는 물길을 알려주는데 주력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영화는 <자산어보>의 먹물에 스며든 조선시대의 실상을 꺼내든다. 마치 갑오징어 먹물이 퍽 하고 터지듯 말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다 임금에게 버림받은 성리학자는 배교자가 되어 저 먼 상놈의 섬마을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옥음’(玉音)을 들은 적도, 윤음((綸音)을 본적도 없을 사람이지만 마음 한편에는 굳건하게 성리학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파도가 밀려오면 배를 거두고, 해가 뜨면 어망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 것이 이들의 삶이다. 끝없는 세금수탈과 군포 노략질은 결국 백성의 ‘애절양’(哀絶陽-애절하게 양물(생식기)을 자른다)을 부른다.
왕의 세상, 양반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정치역학을 너무나 잘 아는 정약전은 창대의 ‘출세’에 대해 당연히 부정적일 것이다. 그렇다고 창대는 끝내 혁명아는 되지 못한다. 그것은 정씨 형제 모두의 한계일 것이다. 결국 파랑새가 녹두장군으로 부활할지는 이준익 감독의 숙제로 남은 것 같다.
관아에서 펼쳐지는 ‘애절양’ 장면에서 문득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이 떠올랐다. 전혀 다른 상황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 시절 골방에서 끝없는 ‘감각’에 탐닉할 수밖에 없었던 좌절감이나 섬에 유폐되어 물고기나 해부하는 사상가의 심정은 어쩜 비슷할지 모르겠다. 정약전은 사서삼경에도 없는 레시피를 위해 그러했던 것은 결코 아니리라. 그들의 분노를 이해한다면 ‘논어’나 ‘대학’을 꺼내는 것은 잠시 접어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