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러시아를 알기 위해서는 (1917년의) 러시아 10월혁명의 현장을 담은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나 김학준 교수의 <러시아혁명사>를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공산혁명의 역사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면 곧장 오늘의 러시아를 바로 볼 수 있는 책 한 권을 추천한다. 2015년 7월부터 2018년 6월까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러시아를 헤집고 다녔던 하준수 기자의 책이다.
하준수 기자는 모스크바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지금은 KBS국제부에서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열심히 전하고 있다. 작년 바쁜 와중에 자신의 특파원 경험을 담은 책 <나는 모스크바 특파원이다>를 출간하였다. 공산주의혁명, 러시아문학사, 푸틴의 정치역정을 다룬 책은 많았지만 저널리스트의 시각으로 오늘의 러시아를 바라본 서적은 만나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늦게나마 저자를 만나 KBS 모스크바특파원의 업무와 푸틴의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야기를 잠깐 들어봤다.
● 외교국방, 한 우물 파기
“1994년 KBS에 입사해서, 1999년 보도국 통일외교팀에 배치되면서 22년간 외교안보, 군사 분야 쪽만 판 것 같다. 외교부 4년, 국방부 4년, 통상 8년을 부처출입을 했다. 다른 부서에서 <취재파일4321>, <시사기획 창>을 하면서도 이쪽 아이템을 계속 팠었다. 그 외 기간에도 한반도문제, 북한 문제를 들여다본 셈이다.”
하준수 기자는 평생 한반도 문제를 다루겠다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특파원이 되어도 이쪽 문제에 침잠할 수 있는 지역을 원했던 모양이다.
“2011년과 2012년에 취재차 러시아를 찾을 기회가 있었다. 평소 한번 가봐야지 했었다. 러시아는 땅이 넓고, 모스크바 특파원이 관할하는 지역은 더 넓다. 옛 소련, CIS 15개 국가와 몽골이다. 어마어마하다.”
물론, 중앙아시아의 이른바 ‘~스탄’지역도 포함되어 있다.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이다. 취재거리가 있으면 이들 나라에도 달려가야 한다. 우리 대통령이 이들 나라를 공식순방을 하게 되면 이런 지역 소식을 더 알차게 전하기 위해 더 뛰어야한다. 평소 비자 발급이 까다로운 나라이지만 이때는 접근이 조금이나마 나아진다고 말한다.
“이슈는 많다. 우리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토픽이라면 말이다. 가스전 사업도 있고. 물론, 어떤 관점에서는 한물 간 것 일수도 있다. 관광지 소개나 특산물 소개 같은 것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글로벌한 이슈, 남북한 대결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부임기간에 러시아 월드컵(2018년)이 열렸으니 특파원으로서는 축구소식도 전해야한다. 평가전도 리포팅해야 했고 말이다.
“러시아는 광대한 땅을 자랑하지만 인구가 적다.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는 11개 정도다.
모스크바가 1200만, 상트페테르부르크가 538만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때 2700만 명이 전쟁으로 희생당한 나라이다.“
러시아가 세계문제에, 유럽과의 관계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국방-군사문제에서 대주주 노릇을 하는 것은 그들의 역사문제와 연관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 북한을 알자
- 책에서는 북한문제를 많이 다룬다.
“북한 두만강역에서 두만강 철교를 넘어오면 러시아의 하산역이다. 그곳에 가면 시베리아 대륙횡단열차의 제일 뒤칸에 북한 차량이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열차엔 한글이 쓰여 있다. ‘두만강-모스크바’라고.”
- 모스크바엔 북한 사람도 많은 텐데.
“특파원 숙소 근처에 중국대사관, 북한대사관이 있었다. 물론 커다란 공원이 있고. 집 근처 가게에서 북한 대사관 사람을 마주칠 때 사실 놀랐다. 근처에 ‘능라도’라는 아주 유명한 북한식당이 있었다. 그곳에는 주재관이나 관광객이 많이 찾아갔었다.”
책에는 평창 동계올림픽 때 능라도에서 합동응원을 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남쪽사람, 북쪽사람, 그리고 러시아의 한인들까지. 물론,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북한에 대한 경제압박이 강화되면서 북한 식당은 대부분 철수했단다.
- 러시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도시락라면이나 초코파이 취재는 해보셨는지?
“정말 인기가 많더라. 시베리아에서는 석유.가스 개발 현장. 벌목 공사장 등에서 노동자들이 도시락 라면 먹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부동의 인기이다. 초코파이 이야기를 하자면, 공장취재를 하려고 연락을 했더니 ‘그냥 두세요. 지금도 충분히 잘 먹고, 공장 잘 돌리고 있어요’라고 하더라. 그 정도로 인기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 ‘차르’ 푸틴
- 그런데 공산 소련이 무너지고 한동안 러시아, 모스크바는 치안이 아주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 적이 있었다. 스킨헤드족이 설치고, 마피아들이 횡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2000년 대 중반일 것이다. 그때 푸틴이 이들을 다 때려잡은 것이다. 물론, 일부러 상황을 방관했다는 분석도 있다. 공포감을 키우고는 군대를 동원해서 마피아를 쓸어버린 것이다. 경찰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부패도 심각했었는데, 푸틴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경찰 월급을 올려준 것이다. 푸틴의 인기는 그래서 높은 모양이다. 거의 나라를 개조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의 집권욕은 높다. 당연히 책에는 푸틴 대통령의 정치역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서술했다. 대통령 연임 후 총리를 거쳐 다시 대통령 연임 중이다. 2024년까지이다. 러시아 헌법에서 3연임을 금지하지만 그가 어떻게 계속 왕좌를 이어갈지 지켜보는 것도 모스크바 옵서버의 역할일 듯.
“지금 나이가 68살이다. 2024년에 다시 대통령으로 나온다면? 후계자를 세울 생각이 있다면 무슨 움직임이 있을 텐데 아직까진 포착되는 게 없다.”
- 국방/군사/무기분야에도 관심이 많다. 러시아발 기사를 보면 푸틴 대통령은 첨단무기 개발에 국력을 쏟아 붓는 것 같은데, ‘뻥’이라는 분석도 많다.
“러시아는 신형 극초음속 순항미사일 ‘아방가르드(Avangard)’를 내놓았다. 음속보다 20배 빠른 극초음속 신무기이다. 아방가르드와 함께 순항미사일 ‘지르콘’, 중거리 공대지 미사일 킨잘 등 극초음속 무기 3종 시리즈를 내놓았다. 2018년 3월 푸틴이 그런 무기를 처음 공개했을 때는 대선 앞두고 쇼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런데 실제로 무기가 실전배치되면서 미국이 대응책을 서두르고 있다. 극초음속은 미국이 먼저 개발했었는데 말이다. 트럼프가 우주군을 창설한 것도 러시아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하준수 기자는 지난해(2020년) 국방대에서 연수하면서 러시아 무기체제를 집중 공부했단다.
“개인적인 관심일 것이다. 외교안보란 것은 포괄적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미중러일 강대국 경쟁관계이자 동맹관계이다. 안보는 국방과 군사문제가 다 들어간다. 많은 언론사에서 군사/국방전문기자를 두고 있다. KBS에서는 아직 그런 공식 타이틀을 두고 있진 않다. 다만 2018년부터 예전에 시도했던 ‘예비전문기자’ 시스템을 다시 정립하고 있다.”
● 모스크바 특파원이었다.
- 모스크바 특파원이 되려면 어떤 역량을 갖춰야 하는지.
“KBS에서는 해외특파원에 지원하는 첫 번째 조건이 7년차 이상의 기자이다. 그 정도 연차는 되어야 어디 가더라도 독자적인 취재역량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특파원으로 있다 보면 산전수전 다 겪게 되고 자연스레 베테랑이 된다. 모스크바 특파원이 단순하게 외교적 기사만 쓰는 자리는 아니다.”
“그런데 기자사회에선 그 분야에 맞는 문법이란 게 있다. 문화관련 기사와 외교안보 기사가 약간씩 다르다. 월드컵을 앞두고는 축구기사도 써야했다. 스포츠기자가 쓰면 맛깔나게 쓸 것이다. 다행히 본사 스포츠 데스크의 손을 거쳐 방송에 나간다. 볼쇼이발레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3대 콩쿠르, 이런 것도 다뤄야한다. 1년에 한두 번 정상회담이 열리고, 시도때도 없이 사건사고가 터지면 달려가야 한다. 북한관련 이슈가 생길 것이고, 루블화가 떨어지면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보도해야한다. 만능 맨이 되어야할 것이다.”
- 그럼, 모스크바 특파원이 되려는 후학에게 꼭 준비시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물론 어학은 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챌린지 정신이 필요한 것 같다. 굉장한 도전의식을 가졌으면 한다. 그런 생각을 갖고 와야 한다. 땅덩어리가 넓고, 상대적으로 겨울이 길다는 점도 주의해야한다. 겨울엔 해를 못본채 7개월을 견뎌야 한다. 이곳에서 버티려면 멘탈이 강해야한다. 러시아 사람들이 보드카 같은 독주를 많이 마시는 이유를 알게 됐다.”
-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북한 최선희(외무성 제1부상 겸 국무위원) 이야기를 하면서 오선화라는 인물을 소개했다.
“글세. 최선희는 누구의 수양딸로 알려졌다. 수양딸이 어떻게 저런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그 이야기의 핵심은 북한 권력층의 엘리트 수업방식이다. 청소년기에 외국으로 조기유학 가서 그곳에서 교육받아, 추후 정권 핵심 부서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이다.” (오선화가 누군지는 책으로 확인하기 바람)
지난 23일 러시아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한국을 찾았다. 한러 수교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의 회담한단다.
하 기자는 러시아에서 기관 취재는 상당히 어렵고, 모든 과정이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경험담을 말한다. 외교부나 국방부의 취재, 인터뷰는 산 넘고 또 산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와중에 한국 시청자에게 양질의 뉴스, 고급스런 정보를 캐내기 위해 뛰어다닌 특파원의 노고가 느껴진다.
* 러시아 라브로프 외무장관 방한에 맞춰 하준수 기자는 KBS 뉴스사이트에 ▷[글로벌 돋보기] 30년지기 한·러가 가야할 길] 기사를 올렸다. 일독을 권한다 *
● 톨스토이의 나라, 러시아
- 분위기를 바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어렵지만 상황이 좋아질 경우, 러시아를 관광할 사람에게 추천할만한 투어코스는?
“너무 많다. 관광 상품으로 나온 것을 보면 대개 1주일 코스가 많더라. 모스크바 이틀, 상트페테르부르크 이틀 식이다. 모스크바에서는 붉은광장, 크렘린궁 보고 볼쇼이 관람한다. 그리고 곧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한다. 페테르부르크는 푸틴이 받드는 표트로 대제가 늪지대 위에 세운 도시이다. 유럽의 변방국가에 불과했던 (제정)러시아가 중흥기를 맞이한 때이다. 도심의 수많은 운하들이 800개의 다리로 연결된 도시로 아름답다. 베니스 느낌이 들 것이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보면 감탄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추천한다면 이번엔 모스크바만 집중적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라고 말하고 싶다. 모스크바에만 각종 박물관. 전시장이 200개가 넘는다. 하루 종일 다녀도 역사와 이야기가 넘쳐나는 도시이다. 모스크바 100km 외곽에는 둥그런 원형 모양의 ‘골든 링(Golden Ring)’이라는 관광지가 잇따라 있는데, 수즈달(Suzdal, Суздаль)이라는 아름다운 도시가 대표적이다.”
찾아보니 수즈달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야외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곳이란다.
“해외특파원은 24시간 대기하는 모드이다. 그럼에도 휴일 오후 정도에 약간의 짬을 내서 모스크바 근교를 둘러볼 수 있다. 50킬로 반경에 수많은 강과 호수, 자작나무 숲이 있다. 어딜 가나 차이코프스키나 톨스토이, 체홉 등 저명한 예술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공원에 앉아만 있어도 망중한을 즐길 수 있다. 힐링이 된다. 물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주일 내내 달려보든지, 볼가강 크루즈 투어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보아하니, 하준수 기자는 3년 동안 러시아에 있으면서 느긋한 관광이나 제대로 된 투어를 못해본 것 같다. “인상 깊었던 곳 중 하나가 키르키스탄이다. 2019년 여름에 여행을 갔었는데 4천~5천 미터의 산악지역이다. 거봉이 있고, 언덕과 호수, 계곡이 펼쳐진다. 내게 맞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
● 러시아를 알자
- 이 책을 쓴 이유는?
“학자들이 쓴 책과 기자들이 쓴 책은 다르다. 한국 언론매체에서 모스크바에 특파원을 보내는 곳은 거의 없다. 푸틴 4기를 맞이한 러시아에 대해 누군가가 기록을 남겨야할 것 같았다. 소중한 기록인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푸틴의 인기가 그렇게 높은데 알렉세이 나발니 같은 인물이 왜 생기고 반정부 집회가 열릴까. 속으로 금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이 순간을 기록해야할 것이다.”
“한국에 돌아오니 러시아 지하철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른다. 그만큼 편하다는 말이다. 1분마다 정확하게 온다. 모스크바 생각이 절로 난다. 보드카와 샤슬릭이 떠오른다.”
1988년 열린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소련’은 금메달 55개로 종합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2년 뒤, 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의 국교가 정상화 되었다. 올해가 한러수교 30주년 되는 해이다.
<나는 모스크바 특파원이다>에는 '11개의 시간대, 광활한 대륙, 풍부한 자원, 러시아를 알자!'라는 부제가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