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어딜 저렇게 바쁘게 걸어가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김종관 감독은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인 물음을 영화를 통해 던져온 창작자다. 그는 전작들을 통해 인간과 그에 담긴 서사에 관한 호기심, 그리고 우리의 삶이 향하는 지점을 부단히 짚어왔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은 창석(연우진 분)이 상실이라는 마음의 음영을 겪은 이들을 만나며 심적인 변화를 겪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김종관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인간 자체에 대한 애정과 그로 인해 비롯된 관찰의 시선을 작품 속에 비췄다.
Q. 지난해 12월 개봉한 ‘조제’ 이후 새로운 작품으로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시국이 시작되고 나서 연달아 두 작품을 개봉하게 됐다. 심정이 어떠한가?
조금 진정된 느낌이다. 좋아서 그렇다기보다는 코로나 상황으로 드는 이런저런 기분 때문인 것 같다. 잠깐 내려놓고 보게 됐고 마치 수행하는 기분도 들었다. ‘조제’ 때는 설레었다면 이제는 마음을 내려놓고 편해졌다. 영화들이 많이 밀려 있고 개봉을 안 할 수도 없다. 흥행보다는 다른 쪽에 의미가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한번 더 용기를 내서 해보자고 생각하고 있다.
Q.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 또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있다. 인간에 관한 세심한 관찰과 다채로운 서사로 이뤄진 작품들로 인해 ‘김종관 세계관’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제’도 ‘아무도 없는 곳’도 긴 과정을 거쳐 하나씩 쌓아 올리는 작업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봐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을 원동력으로 다음 것도 해볼 수 있는 것 같다. 어떤 창작자든 자기만의 세계관이 있지만 나는 운이 좋게 내가 하고 싶은 영화들을 만들어 왔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전의 형태에서 고민이 생기면 그것을 이어서 만들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군에 있는 창작적인 물음을 다음 작업으로 해왔다. 시간이 지나서 더욱 나이를 먹고 많은 창작을 했을 때 그것이 하나의 세계처럼 보였으면 좋겠다. 그러니 창작자의 세계가 있다는 말은 좋은 말인 것 같다.(웃음)
Q. 작품 속에는 실제지만 가공된 듯한, 가공됐지만 실제인 듯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는 소설가 창석이 ‘잘 만든 이야기는 사람이 믿게 되어 있어요’라고 말하는 지점과 이어진다. 링거를 맞으면서 담배를 피우는 환자, 버스 정류장에서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하는 여성 등 다양한 인간의 군상이 관찰된다. 이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지나가지만 사람들의 인상에 남기를 바라는 지점이 있었다. 작품 속에서 시티 커피에 앉아있는 나이 든 손님들을 예로 들 수 있다. 늙음의 서글픔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창석의 입장에서는 누군가와 늙어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삶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양쪽에 대한 시선들을 같이 가져가고 생각할 수 있는 영화가 되길 바랐다.
Q. 이번 작품도 역시 감독의 애정이 들어간 배경들, 서촌의 익숙한 풍경들이 엿보인다. 공간을 비추는 작업에 기울었던 노력이 궁금하다.
공간이 중요한 작품이었다. 전작들 또한 잘 아는 공간들을 담았다. 일상적이나 도시가 가진 속도와 다르고 비일상적인 틈이 있는 공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은 그늘의 영역에서 만들어보자는 의제가 있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중전화 부스도 지금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용도가 남아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랑 가장 닮아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공간이라도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나. 그중에서 우리의 영화에 맞는 한 순간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Q. 공간의 디테일도 훌륭하나 이야기의 소재도 김종관 감독의 취향이 들어가 있다. 특히 전작 ‘조제’에 이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위스키가 다시 등장했다. 감독의 취향이지 않나?(웃음)
위스키 마시는 것을 확실히 좋아한다.(웃음) 가상의 이야기 속에 내가 잘 아는 것들을 끼워 놓는 것이 재밌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거짓말로 진화하는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맞춰지는지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게 아는 것들을 넣다 보면 나의 개성이 영화 안에 보인다. 의도적으로 창석을 나와 일치시키려는 마음은 없었다. 작품 속 창석은 자신의 상실로 인해 타인의 상실과 고통에 대해서 더 깊게 보는 인물이고, 그러기에 그 주제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창작을 통해 이전에 없던 이야기를 해볼 수 있고 그 안에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섞여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작품 속에 나오는 토끼 이야기도 내가 직접 겪은 이야기다. 연우진 배우가 맛깔나게 연기한 장면이어서 좋아한다. 다른 추억이지만 그때 등장한 위스키 잔도 추억이 있는 잔이다.
Q. 이러한 작업을 완성하는 데 배우들의 힘도 컸을 것 같다. 특히 윤혜리 배우의 캐스팅 계기가 궁금하다.
당찬 느낌과 쓸쓸한 느낌이 같이 묻어나는 배우다. 자신만의 툭툭한 발성과 어투를 가진 점들이 대사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정적인 연기력이 필요했기에 더욱 윤혜리 배우를 떠올렸다. 유진이 등장하는 신은 빛이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해가 지는 그 순간 두 사람이 담배를 피는 장면은 한 테이크만 찍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연기적으로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Q. 윤헤리 배우 이외에도 다양한 배우들이 등장하고 연우진 배우를 중심으로 여러 배우들이 돌아가며 대화를 나눈다. 연출한 감독의 입장에서 그중 베스트 커플을 뽑는다면 누구일까?(웃음)
(웃음)사실 모두가 다 케미스트리가 좋았다. 창석 역을 맡은 연우진 배우가 모든 배우들과 호흡들이 좋아서 다 모두와 호흡이 잘 맞았다. 그것이 연우진 배우의 장점인 것 같다. 모든 것을 받아내고 누구랑 해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 있다.
Q. '아무도 없는 곳'은 상실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는 작품이다. 마치 대나무숲처럼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남모를 비밀이나 상처들이 치유받는 느낌이다. 이를 연출한 감독으로서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로 전해졌으면 좋겠는가?
‘빛이 아닌 어둠의 이야기를 들어도 편할 수 있구나’, ‘슬픔의 이야기가 사람한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구나’라는 기분이 들었으면 좋겠다. 힘들 때마다 웃고 힘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웃음을 강요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면에서 관객들이 이 영화를 통해 어둠도 편안할 수 있다는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