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다큐 인사이트]에 편성되어 시청자를 찾고 있는 [모던 코리아] 시리즈가 KBS 다큐멘터리의 신기원을 열었다. 1973년 한국방송공사로 세상에 TV전파를 쏘아올린 KBS는 반백년 동안 한국의 시청자에게 대중문화의 첫 번째 윈도우 역할을 하며 산더미 같이 많은 영상자료를 남겼다. 베타테이프에서 디지털까지, 그리고 때로는 현장 제작진의 카메라에 잡힌 영상들이KBS방송콘텐츠 아카이브로 오롯이 저장되어 언젠가는 세상에 다시 빛을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먼저 쌓인-사실 자료실은 아주 쾌적하다-아카이브 속에서 역사의 순간을 꺼집어내는, 시간의 마법을 부리는 피디들이 있다. [모던코리아] 제작진이다. 지난 주 방송된 8번째 에피소드 [포스트모던코리아: 한국과 일본]을 연출한 이태웅 피디를 만나 ‘아카이브 발굴 작업’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아는 만큼 보이는 프로그램
- [포스트모던코리아]는 시작되자마자 이어령 교수의 강연으로 시작된다. “.일본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냉철하게 봐야한다. 열혈애국자는 많았지만 그들을 막을 지적인 작업이 없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한다." 이런 발언이 수십 년 전 KBS 전파를 탄 것이다. 방송에서는 화자도, 방송정보도 없다. 어쩌면 너무나 불친절한 오프닝 아닌가?
이태웅피디: “[모던 코리아] 시작할 때부터 제작진에서 논의했던 것이다. 어느 선까지 설명해야하냐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화면에 등장하는 YS를 알지 못하는 시청자도 많다는 것이다. 시청자가 영상에 흥미를 느끼고 능동적으로 더 알아보게 만들고 싶었다. 자막도 많이 들어가지 않고, 내레이션도 없다. 아는 만큼 보이는 프로그램이지만 관심 있게 지켜봐주시고 찾아봐 주시면 좋겠다.”
- YS(김영삼)뿐만 이어령, 한완상, 최인호, 안익태 등 여러 ‘역사적 인물’이 등장한다.
이태웅피디: “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에 집중했다. 내레이션도 쓰지 않은 것은 영상에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였다. 내레이션을 넣는 순간 어떤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그림의 의도는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한. 그렇게 시청자의 생각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날 것 체로 승부를 걸고 싶었다.”
● 필드의 사냥꾼, 아카이브의 모험가
이태웅 피디의 다큐멘터리가 불친절(?)하다면 어떤 이유일까. 이태웅 피디는 ‘시사교양’ 피디가 아니다. KBS에 ‘스포츠’PD로 입사했다. 즉, 월드컵경기나 올림픽 중계 때 실력발휘를 하는 전문피디이다. 그가 어떻게 ‘모던코리아’를 하게 되었을까.
이태웅피디: “스포츠국에서 담당하는 것은 주로 중계방송일 것이다. 그런데 내용적으로 스포츠일 경우 다큐 프로그램도 만든다. 그런 프로그램도 만들다가 [모던 코리아]같은 다큐를 만들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태웅 피디는 스포츠 중 특히 축구를 좋아한단다. 2002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월드컵이 있었고, 운명적으로 KBS 스포츠PD로 발을 들여놓았단다. 이후 아테네올림픽 등 수많은 스포츠 이벤트에서 운동선수마냥 뛰어다녔다.
이태웅피디: “하다 보니 다큐멘터리까지 하게 되었다. 중계업무 위주에서 보자면 과외 업무인 것 같다. 하지만 적성에 맞았다. 2010년, 11년에 스포츠국 특집으로 [씨름]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다.”
이태웅 피디의 이름을 알린 것은 서울올림픽 30년 특집 다큐멘터리 [88/18]을 통해서이다.
- 스포츠 중계를 연출하셨으니, 다큐를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이 있는가.
이태웅피디: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처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다. 내레이션 같은 설명 없이, 인터뷰도 없이, 카메라에 찍힌 상황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랐다. 몰입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 KBS아카이브의 힘
- KBS아카이브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을 것 같다. 영상자료실에는 꽤 많은 영상자료가 있다. 필요한 영상을 찾아내는 것도 보통 작업이 아니었을 것 같다.
이태웅피디: “야구경기를 예로 들자면 9회 게임에 쏟아지는 중계 테이프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주요장면만 모아놓는 것이다. 대신, 영상자료실과 신관 4층 스포츠국 사무실에 가면 경기장면과 방송에 안 나간 소스영상이 쌓여있다. 그 영상더미에서 뭔가를 찾아가는 작업이 최우선 과제였다.”
-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런 영상을 구했을까 싶은 장면이 많다.
이태웅피디: “정말 운 좋게 얻어걸린 것들이다. 당연히 검색을 최대한 활용했다. 연관키워드 검색까지. 하나의 테이프에서 시작하여, 촬영원본을 뒤지고, 다른 아이템으로 확대시켜 찾다보면 재밌다. 찾으면 찾을수록 쏟아진다.”
- KBS는 1973년에 문을 열었다. 영상자료는 어느 정도인가.
이태웅피디: "박정희 시절 영상은 물론, 그 이전 영상도 많이 보존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담은 미군 촬영 본도 있고. 오래 전 필름으로 찍은 것에는 오디오가 없는 경우가 많다. 방송에 쓸만한 영상은 80년대 초부터라고 봐야할 듯하다. 컬러시대와 함께 오디오 영상이 많다.“
(참고로, KBS홈페이지의 ‘KBS아카이브’에는 현재 130,647롤의 필름, 251,760개의 테이프, 773,410시간 분량의 디지털파일이 보관되어있다고 한다.)
● 타이포그래피 “눈에 띄게”
- [모던 코리아]가 화제가 된 중 하나가 독특한 자막체(타이포그래피)이다. 궁서체나, 천리마체처럼 프로그램의 시그니처로 작용한다.
이태웅피디: “2011년 씨름을 다룬 <천하장사 만만세>를 만들 때 처음 시도한 것이다. 그때 생각한 것은 1980년대 스타일의 ‘씨름’느낌이 들게, 복고풍으로 레트로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디자이너 김기조와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일이 한 땀 한 땀 그림 그리듯이 만들어나갔다.”
이태웅피디: “음악도 그렇다. 음악을 담당한 박민준(DJ 소울스케이프)은 한국가요의 백과사전 같은 지식을 갖고 계신 분이다. 영상과 딱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스포츠피디 이태웅 피디는 시사교양국으로 파견 나와 [모던 코리아] 작업을 했단다. 곧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운동선수와 뛸 예정이다.
이태웅피디: “평창올림픽 때 확실히 느꼈지만 스포츠라는 것이 국민통합의 장이 된다.스포츠도, 스포츠중계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던 코리아]는 ‘옛날에 이랬지’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렇게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모던코리아]에서 다루고 싶은 아이템이 있다면.
이태웅피디: “사실, 많은 아이템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역시 적절한 자료 화면을 얼마나 찾을 수 있냐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황우석 박사 이야기나 2002년 월드컵 이야기가 좋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재밌을 것 같은 아이템은 ‘워커힐 쇼’이다. 1960년대 루이 암스트롱이 한국을 찾았던 영상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관련 영상이 많지는 않다. 그 시절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순 있을 텐데.”
오늘 방송되는 [모던 코리아] 아홉 번째 이야기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 이야기이다.
이태웅피디: “정주영 회장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그 시대와 그 인물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으면 한다. ‘삼풍백화점’(‘시대유감, 삼풍’) 에피소드 기획할 때 제작진 사이에서는 ‘그 이야기 모르는 사람이 어딨냐?’라는 말도 했었는데,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더라.”
이날 이태웅 피디에게 이런 질문도 해 봤습니다.
- 그래도 오래된 영상이 다시 방송을 타면서, ‘초상권’이나 자신의 ‘흑역사’라며 빼달라고 하는 연락은 왔는지.
이태웅피디: “조심스럽게 작업하고 있다. [휴거]편을 할 때는 신도들 얼굴을 최대한 그래픽으로 가렸다.”
- KBS 대선배들의 기자 리포팅 장면도 많았다. 연락 오신 분들이 있는지.
이태웅피디: “없습니다.”
2021년 ‘모던코리아’는 4개의 에피소드가 준비되었다. 이태웅 피디의 <포스트모던코리아: 한국과 일본>을 시작으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정치 도전기를 다룬 ‘왕이 되려던 남자’(박건 피디), 성폭력특별법 제정 과정을 담은 ‘짐승’(정재은 감독), 90년대 초 대중음악의 중심이 성인에서 청소년으로 넘어가는 변화를 다룬 ‘K팝 창세기’(염지선, 임종윤 공동연출) 순으로 시청자를 찾을 예정이다.
다큐멘터리 공간과 압박 (2012, 연출: 이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