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옥 감독
영화 ‘호루몽’이 11월 3일(화)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언론·배급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날 현장에는 연출을 맡은 이일하 감독과 영화의 주인공인 인권운동가 신숙옥이 참석해 작품의 제작 배경과 연출 의도,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워온 자신의 삶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호루몽’은 재일 코리안 3세 신숙옥이 차별과 혐오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벌인 투쟁과 승리의 기록을 담은 스타일리시 논픽션 무비다. 2017년 일본 방송 프로그램의 허위 보도로 시작된 법정 투쟁부터 2023년 최종 승소에 이르기까지, 신숙옥의 실제 삶과 함께 어머니와 외할머니로 이어지는 3대 여성의 역사를 조명한다.
이일하 감독은 ‘호루몽’이 간사이 지역에서 ‘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과거 자이니치들은 일본인들이 먹지 않고 버리던 내장을 가져와 깨끗이 손질하고 양념해 먹거나 주변에 나누고 판매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한때 버려지던 음식이 시간이 흐르며 일본의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자이니치의 역사와 문화 역시 외면당하거나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꽃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제목에 담았다”고 밝혔다.
이일하 감독은 신숙옥을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영화의 시작을 설명했다. 2000년 일본 유학 시절,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우연히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신숙옥의 발언을 접했고, 상대의 혐오와 차별에 논리적으로 맞서는 모습에 통쾌함과 위로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당시 다다미 4장 반 크기의 작은 방에서 생활하며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이 감독에게 신숙옥의 당당한 발언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일본의 혐오 발언 반대 운동을 기록한 전작 ‘카운터스’를 거치며 신숙옥과 인연을 맺었고, “현장에서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며 투쟁을 이끄는 모습을 보고 ‘원더우먼 같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신숙옥은 처음부터 영화 참여를 결심했던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2013년 일본 내 헤이트 스피치가 정점에 이르렀을 당시, 주요 언론은 물론 노동단체조차 외면했던 현장에서 묵묵히 시민들의 움직임을 기록한 이일하 감독의 행보를 지켜보며 마음을 바꿨다고 전했다. 당시 이름 없는 시민들이 혐오 시위에 맞서고 있었고, 이 감독은 그 현장을 오가며 기록을 이어갔다. 특히 한국인 감독이 일본 사회에서 쉽게 기록되지 않던 역사를 꾸준히 카메라에 담았다는 점에 놀랐으며, 후배 세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출연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신숙옥은 자이니치의 역사와 문화가 다음 세대에 전해져 마침내 꽃으로 피어나기를 바란다는 뜻도 전했다.
신숙옥은 오랜 시간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힘으로 부모의 삶과 한국 근현대사를 꼽았다. 식민지배와 해방 이후의 혼란을 겪고도 민주주의를 이뤄낸 한국의 역사를 보며 자신 역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어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차별과 혐오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는 현실을 언급하며 “이렇게 힘든 세계를 만들어버린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후배 세대들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투쟁을 이어가는 이유가 개인의 권리 회복을 넘어 다음 세대를 향한 책임감에도 있음을 보여줬다.
신숙옥은 어머니와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의 차이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조선·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자신과 달리, 어머니는 일본인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다는 것. 어머니가 한국 이름으로 살아가기를 바랐지만, 결국 어머니에게는 어머니 자신의 인생과 시간이 있었다며 과거 자신의 정의감으로 어머니의 선택을 바라봤던 태도를 돌아봤다. “저에게는 저의 인생이 있고 엄마에게는 엄마의 인생과 시간이 있다”는 말은 재일 여성 3대가 각기 다른 시대와 환경 속에서 선택해 온 삶의 무게를 전했다.
신숙옥은 혐오와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일 민족 국가는 존재할 수 없으며, 누구나 이주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이어 세계 곳곳에서 차별과 공격을 받는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함께 연대해서 싸워나갔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신숙옥 역시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남성들”이라며 ‘호루몽’에는 자이니치 여성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다양한 역사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 역사를 관객들이 마음에 담아가기를 바란다는 말로 작품을 향한 당부를 전했다.
제22회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과 시청자·관객상,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 ‘호루몽’은 11월 11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