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아메리칸 드림’
우리나라에 일본영화, 일본대중문화의 빗장이 정식으로 열린 것은 1998년이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와서야 일본의 대중문화가 순차적으로 개방된 것이다. 1차 개방조치로 4대 국제영화제(칸·베니스·베를린·아카데미) 수상작품이 한국극장가에 정식 상영될 수 있었다. 그 첫 번째 수혜작품은 키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였고, 이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사>가 뒤늦게 한국영화팬에게 소개된 것이다. "왜색 짙은 문화가 한국 영화계를 단숨에 잠식할 것"이라는 강한 위기감과 반발 여론이 있었지만 일본영화가 그렇게 맹위를 발하지는 못했다. 대신 다양한 장르의 일본영화들이 조금씩 소개되었다. 초창기 ‘개방’된 영화중에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가 있다. 미타니 코키라는 작가의 반짝이는 말의 성찬을 느낄 수 있는 코미디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황정민이 제작한 뮤지컬 <오케피>도 이 사람 작품이다.
미타니 코키 작품은 묵직한 주제를 코미디 감각으로 풀어내는데 비상한 재주가 있다. 거의 밀실에 가까운 제한된 공간에서 특정 주제를 두고 치열한 상황극을 펼친다.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사정을 가장 그럴듯하게, 필사적으로 이야기한다. 속사포 같은 대사와 엉뚱한 대사가 간간이 끼어들며 관객들을 조금씩 웃기더니 어느새 사건 전개에 완전히 몰입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풀어나가던 인물이 하나둘 무대 뒤로 퇴장하더니 마지막 인물이 사무실 문을 잠그고, 무대의 불을 끈다. 어느새 관객은 그 이야기와 인물, 사건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동의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게 된다.
미타니 코키의 최신작은 올해 초 일본 무대에 오른 <아메리칸 드림>이다. 특이하게도 일본 주요도시 순회공연 도중에 한국, 서울을 찾아 사흘 동안 공연을 펼쳤다. 일본배우들이 한국 무대에 올라 일본어로 공연을 펼치는 것이다. 관객들은 무대 상단의 스크린의 자막을 통해 이야기를 따라가는 구조이다. 일본작가의, 일본배우의, 미국현대사 이야기가 한국관객에게 어느 정도 먹혀들까. 궁금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1950년대 초 미국 정가와 영화계를 휩쓴 매카시즘에 대한 풍자극이다. 위스콘신주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Joseph McCarthy)라는 정치인은 그다지 별 볼일 없던 인물이었다. 매카시는 1950년 연설에서 국무부에 공산주의자 205명이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며 반공주의 광풍에 불을 지폈다. 그게 큰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때는 1950년. 소련의 부상으로 베를린이 갈리고, 대륙이 공산주의에 석권되고, 얼마 있다 한국에서는 세계대전급 전쟁이 펼쳐진다. 미국 사회는 공산주의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과 혐오감으로 들끓는다. 이제 대중들의 공포는 형편없는 정치 선동꾼에 의해 희대의 ‘마녀사냥', ‘빨갱이 사냥'으로 전개된다. 매카시즘이라는 반공주의 광풍이 미국 사회를 휩쓸던 시기, 할리우드 영화인들을 소환한 비미활동위원회의 청문회가 영화계에 사상검증과 블랙리스트의 공포를 몰고 왔다.
’비미위원회‘는 할리우드의 영화인의 불순한 움직임을 경계한다.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된(것으로 의심받는) 영화인들을 하나씩 잡아내어 퇴출시키려는 폭풍이 몰아친 것이다. 이제 4명의 영화인들이 소환된다. 제작자, 시나리오작가, 감독, 배우이다. 잘 나가는 사람도 있고, 외국인도 있고, 스타와는 거리가 먼 사람도 있다. (이들은 각기 달톤 트럼보, 엘리아 카잔 감독, 작가 베르톨트 브레이트, 킴 헌터의 사정을 느슨하게 모티브 삼았다) 위원회의 두 사람은 이들을 하나씩 책상 앞에 불러내어 사상검증을 시작한다. 믿거나 말거나, 미국에서, 할리우드에서 말이다!!!
연극 ‘아메리칸 드림’
위원회의 심문 방식은 간단하고 치밀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지극히 어설프다. 제일 첫 질문이 “당신은 과거 공산당원이었거나, 지금 공산당원입니까?”이다. (“너, 빨갱이지?”하고 두들겨 패면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나은가?) 심문은 이어진다. “누구누구를 아는가?” “누구의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는가?” “그때 누구누구를 보았는가?”이다. 이제 흥행 성공으로 한껏 기분이 업 된 제작자,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심으로 들뜬 감독, 미국식 영화제작방식이 마음에 안 드는 시나리오작가(독일인), 언젠가 스타덤에 오르고 싶은 여배우들이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그 파티에 갔었죠.”, “그 감독님이 공산당원일 리가 없어요,”, “정책에 불만을 토로하기는 했지만 그런 의도는 아니에요.”,”글쎄요, 전 몰라요.” 정해진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몰아붙이고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이 기묘한 게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쩔쩔 맨다.
미타니 코키의 <웃음의 대학>은 ‘대동아전쟁' 말기에 일본 공연계의 ‘전폭적 황군지지를 위한 작품 제작운동'을 위해 극본을 대폭 수정하는 ‘대본 검열위원'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보여줬다. 공연예술에 문외한인 검열관이 극본에 대폭 칼질을 가하는 폭력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검열관이 뜻밖에 창작의 감각이 있다는 것이다. 극본을 군국주의, 제국주의 일본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이렇게 저렇게 뜯어 고치다보니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로 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미타니 코키의 <아메리칸 드림>은 ‘사상적으로 오염된' 할리우드 영화인의 자백을 받아내려는 조사위 위원들의 미묘한 사고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말도 안 되는 사상검증과 동료고발을 유도하면서 점차 영화제작방식, 시나리오작법, 배우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타니 코키 특유의 코미디 방식이 작동한다. 매번 나오는 ‘집착과 반복의 아이콘'은 이번에는 독일 소시지에 집중된다. 관객들은 후반부 들어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소시지에 환호할 지경에 이른다.
미타니 코키가 한국에서 ‘유신말기’를 다룬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중정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 그리고 여가수가 등장하여 엄청난 상황극을 펼치기 않을까. 물론 집착과 반복은 시바스 리갈이 적당할지 모르겠다.
경천동지할 인류사적 사건도 미타니 코키의 무대는 한없이 제한적이고, 미니멀한 대사로 채워진다. 그런데 두 시간 남짓의 말의 성찬 뒤에 관객들은 그 인류사적 사건의 허망한 교훈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생각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영화분자’들은 말이다.
▶아메리칸 드림(アメリカン・ドリーム) ▶각본/연출: 미타니 코키(三谷幸喜) ▶출연: 고히나타 후미요(각본가), 아사노 가즈유키(감독), 야마자키 하지메(마이스터), 아사노 마사히로(위원1), 세키야 하루코(여배우), 나카가와 타이시(위원2) ▶공연: 코엑스아티움 우리은행홀/ 2026년 10월 30일(금) ~ 2026년 11월 1일(일)│총 4회
[사진=파르코(PARCO CO.,LTD)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