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훈 작가
지금은 대부분의 행사가 해운대 일대에서 펼쳐지지만 부산국제영화제 초창기에는 남포동 극장가가 중심 무대였다. 지금도 남포동 ‘PIFF광장’ 바닥에서 기라성 같은 영화인들의 손바닥 도장을 만나볼 수 있다. 남포동에서 영화제가 열릴 때는 씨네필들은 용두산 공원과 중앙동 '40계단'을 찾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그 계단 말이다. 그 계단 중간쯤에 동상이 하나 서있다. 누굴까? 무슨 사연일까. 궁금하면 이 책을 보시라. 남정훈 작가의 그림책 <피란소녀>. 2025년 출간된 48쪽 짜리 어린이 그림책이다. 대사는 단 한 줄도 없다. 하지만 책을 펼치고, 그림에 빠져들고, 책을 덮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동안 부산의 코엑스에 해당하는 벡스코에서는 특별한 영화 행사가 함께 열린다. ACFM(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이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도서, 웹툰, 웹소설, AI콘텐츠 등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거래하는 아시아 최고의 종합 콘텐츠 마켓이다. 이곳에 차려진 부스 중 하나인 부산영상센터 앞을 지나다 <피란소녀>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온다. 표지는 흑백이다. 어른들이 오가는 분주함 속에 빨간 목도리 소녀가 유난히 밟힌다. <피란소녀>는 1951년, 흥남철수 당시 피란선에 올랐다가 아버지와 헤어진 소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렇다.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의 그 장면이다. 소녀는 어떻게 빨간 목도리를 매고 있는지, 피란지 부산에서의 삶은 어떠했는지, 당시 부산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40계단의 그 사람은 누구인지. 감동의 그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현장에서 남정훈 작가를 만나서 책 이야기, 부산의 역사, 그리고 부산의 웹툰에 대해 들어보았다. 출판사 깨칠이스튜디오의 이태윤 대표도 자리를 함께 했다.
40계단 ⓒ박재환
이태윤 대표가 먼저 책을 출판하게 된 과정을 소개해 주었다. "이 책은 작가가 부산의 골목들과 계단을 그린 작품을 전시하다가 기획된 책이다. '40계단'에 설치된 동상에는 어떤 스토리가 있을까. 문학적으로 상상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임시수도, 피란수도였다. 그 당시 부산까지 내려온 많은 사람들 중 흥남철수 때 내려온 가족을 그린 것이다. 배를 타기 전에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목도리를 매어주며 잘 따라오라고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배에 올랐고 그 혼란 속에서 생이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이들 가족들의 시선이 다 어긋나 있다."
그림 하단 모퉁이의 작은 인물들을 가리킨다. "그 배가 부산의 항구로 들어오는 장면인데 여기 이 부두 끝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이들은 점바치(점쟁이)이다. 그들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는 방법은 점을 치는 것밖에 없으니까. 지금도 영도다리 밑에 가면 점집이 남아 있다. 작가님은 이 부분부터 그리기 시작해서 전체를 그린 것이다. "
"피난 온 사람들이 살 곳이 마땅찮다. 그래서 천막을 치고, 거적때기를 올려놓고 살았다. 여기가 보수동의 보수천이다. 종이에 기름을 먹여 빗물을 막았고, 밥을 해먹었던 것이다. 불이 나기가 쉬운 구조일 수밖에 없다. 당시 끊임없이 불이 났다. 평지엔 살 곳이 없으니 고개를 따라 올라간다. 동광동, 오름길. 중앙동..."
"부산까지 내려온 사람들, 북에서 교수였으면 뭐하나. 여기선 할 일이 없었다. 항구에서 하역하는 일을 하다가 그것마저도 일자리를 못 구하면 이렇게 미군 군수물품을 훔쳐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렸던 것이다.“
그 다음 그림을 설명한다. "여기가 아미동 비석마을이다. 이곳은 예전에 일본인 공동묘지였다. 당시 건축자재가 부족하니까 비석을 뽑아서 구들장도 깔고 계단도 만들고 벽도 세우고 그랬다.”
"불이 많이 났다고 한다 당시 365일에 한 300일은 불이 났을 정도란다. 그 때 주인공의 어머니와 동생이 하늘나라에 간 것이다. 여기는 소막마을이다. 지금의 우암동이다. 예전에 일본인들이 소를 수탈해 가던 곳이다. 검역소 자리였는데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피난민들이 그 안에 들어가 살았던 것이다."
'피란소녀' 남정훈 작가 ⓒ깨칠이스튜디오
"40계단에서 아버지는 딸을 기다리고, 딸은 아버지를 기다리는데 서로가 엇갈리게 되고 그렇게 70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다. 나이가 든 '금순이'는 40계단의 아버지 동상을 보면서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고 아버지가 매어주었던 그 목도리를 아버지(동상)에게 매주고, 행복했던 시절을 상상을 하는 것이다." ‘금순이’는 흥남철수를 다룬 불후의 대중가요 명곡 [굳세어라 금순아]의 금순이다. "전시회를 할 때는 '굳세어라 금순아'였다. 그런데 책을 내면서 생각해보니 너무 국내용인 것 같았다. 영어로 옮기니 조금 이상했다. 그래서 <피란소녀>이 된 것이다."
"지금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는 여전히 난민들이 많다. 그 많은 난민들, 이산가족들을 생각해서 글이 없는 그림책을 생각한 것이다. 외국인도 같이 공감할 수 있게끔 만든 것이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가장 즐거운 책 '의 '가장 즐거운 책'에 선정되었다."
(부산의 구석구석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가?) "보수동의 책방 골목은 저의 어린 시절 자료창고였다. 만화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살면서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웹툰 연재를 하나 끝내고 부산의 원(原)도심을 그리는 일들을 시작했다. 중앙동 일대라든지 그 곳의 옛 모습을 찾다보니 피란수도 시절의 이야기가 스토리텔링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림들을 전시하다가 이걸 책을 좀 만들 수 없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부스에 있는 그림이 이 책의 원화인가?) “이건 얼마 전 춘천 김유정문학촌에서 열린 대한민국독서대전에서 라이브드로잉으로 그린 작품이다. 사흘 동안 그린 것이다. 전시는 꽤 오랫동안 진행했다. 4년 정도? 첫 전시회는 동아대 석당박물관에서 열렸다. 그곳이 피란시절 임시 정부청사였다. 그곳에서 전시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그동안 전시도 하고, 라이브 드로잉 쇼도 하고, 도서전에도 참여하고 그런다. 12월에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이 열리는데 그 때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부산 피란시대를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할까요?) "그렇다. 100프로 이해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책을 보면 어떤 느낌인지는 다들 아는 거 같다. 스페인도 내전을 겪었기 때문인지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더라. 참. 대만 사람들도 공감을 많이 하더라. 신기하게도 도서전에서 이 책을 사는 사람은 한국사람이 반, 외국사람이 반이다."
남정훈 작가는 부산영상센터에 입주하여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함께 입주한 깨칠이스튜디오의 이태윤 대표와 뜻이 맞아 출판과 후속작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작가님과 대표님은 실향민인가?) "아니다. 어릴 때는 그냥 지나가며 이게 뭔지도 몰랐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림을 그리면서 하나하나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웹툰작가 생활은 서울이 낫지 않은가?) "예전에 몇 번 서울의 출판사와 작업을 해봤는데 책이 나오면 끝이더라. 물론 책이 잘 되면 밀어줄 수가 있겠지만 요즘 잘 되기가 어렵다. 어떻게든지 책이 나온 이후에도 뭔가 콘텐츠를 가지고 더 알릴 수 있는 출판사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남은 것이다. 다행히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한국에서 가장 좋은 책’에 선정되어 홍보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인터넷 세상이니까. 원고를 이메일로 보내면 되니까 작가들이 작업할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 복잡한 서울보다는 여기,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바다가 있는 부산이 낫다. 여기 내려와서 작업하는 작가들도 많이 늘었다.“
남정훈 작가는 젊었을 때 연극을 잠깐 했단다. 그러다가 만화관련학과에 들어갔고 만화를 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 "어릴 때는 윤승운 선생님(맹꽁이서당), 고우영 선생님의 명랑만화 좋아했다. <풀하우스>의 원수연 작가도 좋아했다.” (웹툰은?) "내가 웹툰을 하고부터는 오히려 다른 사람 작품을 더 안 보게 되더라. 시간적 여유도 없고. 다른 작가들 프로듀싱하면서 보긴 하는데 확실히 적게 본다.“
● 남정훈 작가의 대표작을 세 편 꼽자면?
“우선 <마스코 마스코>. 네이버에 연재했던 작품인데 아마 웹툰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판타지작품일 것이다. <아이(I)>는 초창기 작품이다.중화권에 영화판권 계약까지 되었던 작품인데 제작 직전 사드사태가 터지면서 무산된 작품이다. <돌덩이>는 글로벌 프로젝트다. 부산웹툰페스티벌에서 한국과 일본 작가가 함께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로 했는데 제가 스토리와 콘티를 짜고 일본의 타네오 마코토가 그림을 그린 것이다. 11부작 완결판인데 지금 밀리의서재에서 볼 수 있다. 참, 데뷔작 <스몰>은 내 블로그에서 조금 볼 수 있는데 이건 게임으로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프로듀싱을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영화처럼 이젠 만화도 웹툰도 PD가 있다. 처음 기획을 할 때부터 작가와 어떤 작품을 할 것인지, 어디에 런칭할 것인지, 내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 처음부터 케어하는 것이다. <마왕의 딸로 태어났습니다>가 내가 프로듀싱한 작품이다. 이건 넷플릭스에서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피란소녀' 남정훈 작가 ⓒ깨칠이스튜디오
남정훈 작가는 웹툰 작가, 그림책 작가, 웹툰 피디일 뿐만 아니라 영화 스토리보드 작가로도 활약한다고 한다. 바쁜 와중에 카툰집 <명언의 발견>이 다음 달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함흥철수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아이에게, 아니 전쟁의 참상을 모르는 세대에게 남정훈 작가의 책 <피란소녀>를 권한다. (부산/박재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