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로 한국 멜로영화의 정점을 찍은 허진호 감독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킬리만자로'의 극본을 쓰기도 한 그는 <덕혜옹주>와 <천문:하늘에 묻는다> 같은 역사적 인물을 다루기도 했고, <위험한 관계>나 <보통의 가족> 같은 리메이크 작품도 있다. 그가 내놓은 신작은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벌어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을 다룬 '암살자(들)'이다. 제목에서처럼 거대한 배후가 있을 것 같은 음모론적 접근을 시도한다. 하지만 사건을 파헤치는 신문기자의 직업정신은 뜨겁다. 23일 개봉을 앞둔 허진호 감독을 만나 영화와 역사, 그리고 멜로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 사건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인데 온 나라가 슬픔에 젖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부모님도 다 울었던 것 같다. 그 묘한 슬픔이 계속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원래 한석규의 대사 가운데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육영수 여사 돌아가셨을 때 ‘맨드래미가 피어있고 다들 슬퍼하지 않았느냐’는 대사. 우리 세대에는 그런 기억들이 있어서 이 이야기를 한 번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10년 전이다. 시간이 좀 오래 걸린 셈이다.”
Q. 그 동안 사건의 진상에 대해 더 밝혀졌다거나 새롭게 추가한 내용이 있는지.
▶허진호 감독: “사건에 대한 자료는 많다. 각 방송사에서도 20년 넘게 계속 다뤄온 문제이다. 여전히 의문점도 많이 남아있다. 다큐멘터리를 보며 남은 의문점은 유튜브를 재생산되는 것이다. 10년 전에 시나리오를 보고, 자료화면 보고, 일본에서 나온 자료들까지 보면서 조금씩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영화 '암살자(들)'
Q. 그럼 감독의 시선은 어떤 식으로 들어갔는지.
▶허진호 감독: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화 것이니 영화적인 장치가 좀 필요했다. 그래서 형사인 철구, 기자인 재환, 영일 이런 인물들을 통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시선을 넣고 싶었다. 1970년대는 억압된 시기였다. 저는 어렸을 때라 잘 모르지만 어른이 되어 봤을 때 폭력이 지배했던 사회였다.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Q.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것보다는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것 같다.
▶허진호 감독: “자료들이나 사실들에서 의문점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 것으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했을 때 그 시대를 뜨겁게 살았던 각각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발로 뛰는 취재, 자료 조사는 한계가 있으니 책이나 자료, 논문을 많이 봤다.”
Q.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과 함께 동아일보 기자해직 이야기가 영화의 주요 사건으로 다뤄진다.
▶허진호 감독: “두 이야기를 함께 다루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끝낼지 고민이 많았는데 촬영 몇 달 전에 이 이야기를 가져온 것이다. 시기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같이 한다면 시대 분위기를 더 분명하게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에 대해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도, 내려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신 사건들과의 연결고리가 있지 않았을까. 전체적으로 억압의 시대라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신문사 이야기만으로 또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이니 고민이 많았다.”
허진호 감독
Q.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경찰들까지 무자비하게 다루고, 신문사에 상주하며 기자들을 옭죄는 모습을 통해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폭력적인 부분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허진호 감독: “그 당시 막걸리 보안법이라고도 했다. 술 마시다가도 잡혀가던 시기였다. 실제 모 편집국장이 중정 하급간부한테 따귀를 맞는 사건도 있었다. 그런 시대 분위기를 가지고 오면서 좀 더 폭력의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시대에는 의문사도 많았다. 실제 남산이란 곳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이었다. 그런 폭력적인 부분을 표현하려고 그런 장면을 넣은 것이다.”
Q. 기자는 어떤가. 김재환 부장(박해일)과 한영일 기자(이민호)는 데스크와 취재기자이다.
▶허진호 감독: “부장이 너무 부드러워서 리얼리티가 좀 떨어지지 않나 생각도 했었다. 경찰인 철구(유해진)는 가족 이야기를 통해 이 사건을 대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재환은 신문사 동료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언론의 가치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가 데스크이니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냉철하고 논리적으로 사건을 바라볼 것이다. 영일은 신입기자여서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정의감에 넘치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Q. 그동안 나온 허진호 영화와 비교하면 아주 뜨거운 영화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허진호 감독: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같이 일하는 동료를 생각해 보면, 거대한 외부의 압력에 의해 저항하는 모습들을 다루면서 온도가 좀 뜨거워져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의문이 들 때 이모개 촬영감독이 ‘감독님, 이럴 때는 좀 뜨겁게 찍어야한다’고 했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제가 그런 부분에는 낯설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익숙지도 않아서.“
Q. 이렇게까지 뜨거워질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한 부분은?
▶허진호 감독: “차분하게 갈 수가 없는 부분이지만 약간 불편했다. 예를 들어서 엔딩 장면을 찍을 때이다. 그것을 표현할 때 뜨겁게 보여주는 방법이 있고, 관찰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거리감을 두고 가져갔다면 이번엔 좀 더 그 인물에 가깝게 들어가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많이 배우면서 작업을 했다.”
Q. 배우들과의 소통은?
▶허진호 감독: “모두가 자기의 자리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 직업적 소명에 따라 살았던 사람이다. 형사 철구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 사건이 갖는 불합리함에 대해, 그리고 경찰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생각이 있을 것이다. 기자 집단도 차별을 두고 싶었다. 영화를 봤을 때 진실을 찾는 하나의 서브테마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진실이란 것은 정말 어렵다.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이렇게 뜨겁게 움직이지 않았을까. 끝까지 가려는 그런 시대정신이 지금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Q. 올리버 스톤 감독의 <JFK>처럼 진실추적극인 듯하지만 후반부 다른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관객의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허진호 감독: “두 가지를 같이 해보고 싶었다. 미스터리 추적극 형식과 함께 그 시대의 인물을 같이 다루려고 했다. 미스터리 추적극만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자신이 없었다. 어떤 사회적인 사건, 상황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모습, 그 영향을 함께 그려야했다. <JFK>에는 실명이 많이 등장하고, 영화적 픽션도 많다. 이런 사건에 어떤 결론을 내리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한 방식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질문만 있다면 음모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재환이라는 인물이 음모론적 이야기를 가정해서 한 것은 없다. 기본사실을 바탕으로, 왜 이렇게 빈틈이 있을까, 왜 이들이 계속 거짓말을 할까. 질문하는 것이다.”
영화 '암살자(들)'
Q. 이 영화가 2026년,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허진호 감독: “지금도 어떤 큰 사건,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어떤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방식에 있어서 생각해 보았을 때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파고드는 것이 지금도 유용하지 않을까. 개인의 선입견이나 집단의 편향성이 있겠지만 진실은 있을 것이다. 굉장히 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Q. 당시 사건을 조사를 많이 했다고 했는데, 영화를 보면 ‘공범이 있다’, ‘국면전환용이다’는 식의 장면이 있다. 그럼 관객들이 이 작품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
▶허진호 감독: “영화를 만들 때 다큐나 자료를 기반으로 한 것은 맞다. 그것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했다. 보기에 따라 이게 음모일 수도 있다거나 현실을 은폐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볼 것이다. 시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제가 이건 팩트이고 이건 상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관객이 영화를 보고, 다큐를 찾아보면 재밌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Q. 영화 <덕혜옹주>도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다. 그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과 비교하여 이 영화는 어떤가.
▶허진호 감독: “감독이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 만들 때는 고민을 하게 된다. 역사에 대해 일단 많이 알아야하고. ‘덕혜옹주’에 대해 다른 시각이 있다는 것도 안다. 내가 만든 것이 모두 상상력만으로 만들 수는 없다. 뭔가 베이스가 있어야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상상이 더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게 모두 음모론적인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실제 사건과 비교하면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려웠다. 이 영화를 만들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이다.”
Q. ‘국립극장’과 신문사 편집국 모습 등 공간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
▶허진호 감독: “정말 시대극을 찍기가 어렵다. 1970년대, 80년대, 90년대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이 거의 없다. ‘국립극장’은 세 군데에서 찍은 것이다. 실내, 중간로비, 실외풍경이 다 다른 곳에서 찍은 것이다. 신문사도 그렇다. 세트를 생각했었다. 실제 있는 공간이었으면 해서 찾아낸 곳이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불어오는 그런 곳. 영화를 찍으면 미술 스태프들이 나에게 많이 물어보더라. 1970년대 기억들을 불러내는 이미지. 철구 집 지붕에 배드민턴(셔틀콕)이 있다거나. 일본이나 유럽은 옛 건물이 많이 남아있는데 우린 시대극 찍기가 어렵다.”
Q. 배우들 캐스팅 관련하여
▶허진호 감독: “철구 역으로 유해진을 먼저 생각했었다. 그는 살아있는 연기를 한다. 틀에 매여 있지 않고 자기감정을 갖고 연기를 하는 게 매력적이다. 철구의 열정적인 모습과 접점이 있다. 박해일 배우는 <덕혜옹주>에서도 기자로 짧게 나왔다. 기자의 강직함 같은 게 있다. 논리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이 바로 떠올랐다. 영일을 연기한 이민호는 신입기자가 가지는 좌충우돌하는 열정, 신념을 보여주기에 적격이었다.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이미지로 생각했는데 <파친코>에서 매력적인 모습을 봤다. 현실에 발을 디딘 모습이 표현될 때 괜찮을 것 같았다.”
영화 '암살자(들)'
Q. 엄태웅이 등장한다. 그 외 많은 특별출연이 영화팬을 시선을 사로잡는다.
▶허진호 감독: “고민을 많이 했었다. 캐릭터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다. 신들이 많지 않은 배우들과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냥 흘러지나가는 배우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우성 카미오에 대해서는?) “그럴 경우 그 장면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극중 한 회장은 좀 더 무게 중심이 될 수 있는 배우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배역을 제안을 했을 때 다들 오케이해 준 것이다. 이렇게까지 우리 영화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다.”(허진호 감독이 제안하면 다들 출연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건 절대 그렇지 않다. 신현빈 배우는 깜짝 놀랐다. 기술시사회 때 보면서 나 스스로 놀랐다. 배우들 보는 맛이 있는 영화이다.”
Q. 영화에서 인상적인 작품이 육 여사가 청와대를 떠나갈 때의 박정희 대통령 영상이 삽입되는 신이다. 그 시절의 감성을 남긴 유일한 장면 같다.
▶허진호 감독: “조금 아쉬운 장면이 있다. 사실 영화에서 사람들이 우는 장면을 되게 길게 찍었는데 많이 편집되었다. 당시는 전파상 앞에서 사람이 중계를 보던 시절이었다. 앞에서는 애들이 놀고 있고. 나도 그랬었다. 조금 편집된 부분이 있는데 철구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승객들이 다들 울고 있는 모습을 찍었는데 편집상 삭제되었다. 운구차 장면은 대한뉴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Q. 예전 영화를 다시 보면 드는 생각은.
▶허진호 감독: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었으면 한다. 언제까지 이 작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랑 같이 영화 만들던 사람 중에 여전히 감독을 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 없다.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찍을 때는 이거 언제 끝나나 싶지만 놀고 있을 때는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 같다.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내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왜 그렇게 평가가 좋았을까 생각해 봤다. 그렇게 다시 만들어볼까 생각도 하지만 그것이 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변하나? 사람이 어찌 변할 수 있지? 지금 보는 시선이 지금의 저인 것 같다. 물론 완전히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이전에 만든 일상적인 영화, 그런 이야기를 지금 다시 만들어보고 싶다. 요즘 관객에게 어떤 접점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대본도 준비하고 있다. 어려운 것 같다.”
허진호 감독
Q.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좋아한다.
▶허진호 감독: “10년 전에 그 영화를 다시 봤는데 재미없었다. 그런데 작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하며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감독에게는 숙명이랄까. 자기 작품을 볼 때 작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편집하게 되고, 후회하고 그런다. 다시 봐도 그런 부분이 있는데, 또 나름 장점이 있더라. (그때는) 내가 저런 시선을 가지고 있었구나. 참 좋네하며 긍정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 영화를 지금 만들겠다면 투자가 안 될 것 같다. 이 영화가 잘 되어, 그런 영화를 다시 만들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면... 도와주십시오.”
Q.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도 결국 만들어졌다.
▶허진호 감독: “그건 이창동 감독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하하하)
Q. ‘암살자(들)’에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는지,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는?
▶허진호 감독: “평소 시대를 다룬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것에서 영화적으로 관심이 생기는 게 있다. 1970년대는 제가 어렸을 때라 문화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통기타 같은 음악도. 그 시대를 (다룬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다른 접근 방식으로. 이 영화는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한다. 메시지는 관객들이 찾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영화가 가지는 몫이라고 생각한다.”
Q. 아, 넷플릭스에서 ‘스캔들’이 공개된다. 허진호 감독도 <위험한 관계>를 만들었었다. 외국 작품을 리메이크, 재해석할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허진호 감독: “1930년대의 모던한 상하이 시대를 다룬다는 것이 좋았다. 분위기가 말이다. 약간의 멜로적 느낌이 있어서 선택을 했었다. <위험한 관계> 소설은 영화로, 드라마로 많이 만들어졌다. 이번에 정지우 감독의 드라마도 기대가 된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과 함께 한국언론의 고난길을 다룬 허진호 감독의 차갑고도 뜨거운 영화 <암살자(들)>은 23일 개봉한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