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곤 감독
무려 지난 세기, 1999년. 청년 손재곤은 한겨레영화교실에서 영화제작 수업을 듣고 아마추어 영화제작모임 동료와 함께 소니 VX-1000으로 스릴러 영화를 한 편 찍는다. 우연히 살인장면을 목격하고는 방안에 굴려 다니는 비디오테이프에 급하게 찍는다. 그 청년도 살해당한다. 그런데 녹화된 테이프는 이미 비디오가게 반납기에 들어간 상태. 살인자는 미친 듯이 가게 비디오를 빌려 문제의 테이프를 회수하려 한다. 그렇게 그 많은 영화를 본 살인자는 히치콕의 숭배자가 된다. 아마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35만원으로 완성되었다는 전설적 작품 <너무 많이 본 사나이>이다. 당시 유명했던 ‘십만원 영화제’를 거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으로 표기되던 시절)에 진출한다. 초초초저예산으로 기발한 영화적 상상력을 뽐낸 손재곤 감독은 자연스럽게 주류영화계에 진출한다. 그리고 <달콤, 살벌한 연인>과 <이층의 악당>을 감독했고, 한동안 공백을 가진 뒤 <해치지 않아>가 나왔다. 그리고 또 한 세월을 보내고서 <와일드 씽>으로 돌아왔다. 히치콕 스릴러와 채플린 코미디에 K-POP 스토리가 범벅이 된 작품이다. 개봉을 앞두고 그 누구보다도 ‘흥행결과’에 초조한 감독을 만나 작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폭소가 끊이지 않았던 일반 시사회에서의 관객들의 반응을 전하자 감독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너무 재밌어요’, ‘너무 웃겼어요’라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다. 그런 현장에서는 스태프들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크다. 예전에 만든 영화들이 다 그랬다. 대본을 쓰면서 이건 너무 재밌겠는데 생각했지만 막상 극장에서 관객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Q. 배우들의 면면이 ‘내향적’인 것 같은데, 특별히 이렇게 캐스팅한 이유가 있는지.
▶손재곤 감독: “캐스팅을 할 때 코미디 연기로 인정을 받는 사람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캐릭터에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 그럴 경우 관객들이 편한 코미디로 못 받아들일 수가 있으니 대신 코미디 연기에 뛰어난 배우를 찾는 것 같다.”
Q. 홍일점, 도미 역에 박지현이 출연한다. 걸 그룹 출신 배우들도 많은데, 박지현 배우를 캐스팅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손재곤 감독: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작품을 볼 때 영화를 우선적으로 본다. 박지현은 드라마에도 출연했지만 그 당시 <히든 페이스>에 나왔었다. 그런 식으로 우선적으로 영화에서의 연기를 본 것이다. 다음에도 그렇게 할 것이냐고 물으면 아마 아닐 것 같다. 배우들의 주 활동무대가 이젠 드라마나 시리즈가 되었으니. 영화 풀이 좁아졌다.”
영화 '와일드 씽'
Q. 강동원은?
▶손재곤 감독: “강동원은 20년 이상 주류 영화에서 주연으로 계속 활동해 왔다. 저도 20년 이상 그의 작품을 극장에서 봤었다. 이미 여러 차례, 다른 영화 대본을 보냈었다. 그러다가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다.”
Q. 엄태구 배우의 경우는?
▶손재곤 감독: “영화에서는 인상적인 가능성을 봤었다. 평범한 생각이었다. 엄태구가 3인조 혼성그룹의 래퍼가 된다면 웃기지 않을까?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담은 된다. 만약 잘못된다면 배우의 부담이 더 클 것이다. 엄태구 배우는 이 작품 직전에 로맨틱코미디를 찍었다. 한선화 배우와 나온 <놀아주는 여자>(JTBC,2024)이다. 보면서 ‘아, 내가 먼저 했어야했는데..’라는 감독의 속 좁은 생각을 했었다. 결과적으로 그 작품을 먼저 경험했기에 배우에게 더 나가는 용기를 준 것 같다.”
Q. 오정세 배우의 코미디 연기에 대해서는?
▶손재곤 감독: “오정세 배우 작품 중 코미디 비중은 크지 않다. 그런데 왜 그가 코미디에 능한 배우라고 생각했을까. 몇몇 작품에서 보여준 연기가 커다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런 임팩트를 남길 수 있을까. 그런데 훌륭하게 코미디 연기를 보여준다.”(오정세 배우는 애드리브에 능한가?) “그렇지는 않다. 배우들에겐 각기 스타일이 있다. 코미디 연기도 그렇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 와서 현장에서 감독에게 보여주는 타입이 있다. 오 배우가 그런 배우였다. 매 신마다 연구를 해오고 아이디어를 낸다. 작은 제스처, 대사 하나도 그렇게 준비하는 타입이다.”
Q. 시나리오를 쓴 김채우 작가에 대해.
▶손재곤 감독: “이전에 같이 작업을 해 본적이 있고, 제작사인 어바웃필름이랑 계속 작업해온 작가이다. 코미디 감각이 좋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첫 대본 작업 때부터 옆에서 봤고, 모니터했었다. 그런데 저라면 이런 소재로 영화로 만들겠다는 선택은 못했을 것 같다. 로그라인에 뭔가 더 있어야만 대본을 썼을 것이다. 김 작가는 계산하고, 심도 있게 따지고 하는 것을 떠나 ‘이거 어때요’식으로 쿨하게 접근한다. 그런 게 요즘 젊은 감각과 더 어울리는 것 같다.”
Q. 코미디적 느낌보다는 아주 진중한 접근을 하는 것 같다.
▶손재곤 감독: “영화를 몇 편 만든 뒤 한동안 만들지 못하면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영화를 찍을 때도 그런 계산을 불필요하다 싶을 만큼 많이 하게 된다. 이게 재밌을까? 이걸 뺄까, 더할까. 결과적으로 내가 뭘 뽐내고, 나 스스로에게 재밌을까 생각을 하다가 이제는 흥행과 관련하여 관객 반응을 더 중시하게 된다. 그게 일상에서도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농담을 했는데 주위 사람이 웃어주지 않으면 창피하다. 영화도 그렇다. 예전에 농담을 좋아했었다. 영화를 만들며 사람들을 웃기려고 농담을 던진다. 그런데 수십 명, 수백 명의 관객 앞에서 그런 시도가 실패했을 때 그 망신스러움. 그런 것이 어느 순간 부담이 되더라. 한 편의 영화에서 수십 번의 코미디를 던지는데 그게 실패하면 좌절이 크다. 그래서 안전한 방법으로 뭔가 시도를 안 하게 된다. 일상에서도 농담을 안 하게 되고. 하지만 극장에서 웃으면 기분이 아주아주 좋다.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 200면이 와서 웃어주는 것. 아마 스포츠 선수도, 가수들도 그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을 것이다.”
Q. 영화의 시작은 언제부터였나.
▶손재곤 감독: “영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10대 때였다. 그 시절 홍콩영화가 인기였다. 다양한 장르의 홍콩영화가 쏟아질 때였다. 멋있게 폼 잡는 영화도 있고, 로맨스도 있고, 코미디도 있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TV시트콤도 좋아했다. 보면서 나도 저런 세계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모든 것이 코미디로 풀어지는 것 같았다. 심각한 인생도, 괴로움도. 홍콩은 활력이 넘치고 세련된 세계였던 것 같다. 어릴 때 동경했던 것 같다. 소설, 특히 추리소설을 많이 좋아했다. 생각해보니 코미디를 항상 좋아했던 것 같다. <젊음의 행진>이나 <유머1번지>, <영11> 같은 것 기억난다. 코미디 좋아하고 추리소설 많이 읽다보니 범죄와 코미디 섞는 것을 좋아하게 된 모양이다.”
Q. 혹시 <너무 많이 본 사나이>를 최근에 다시 본 적이 있는가?
▶손재곤 감독: “정식으로 공개된 것도 아니고, 저작권 문제로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비디오 화면을 그대로 삽입했고, 음악 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냥 영화에서 음악 추출해서 넣었다. 정식으로 보긴 어려울 것이다. 당시 독립영화 모임에서 상영을 많이 했었다. 저도 자기 작품을 잘 못 보는 사람이다. 무슨 이유로 다시 보다가 후다닥 끈 기억이 난다.”
손재곤 감독
Q. 후반부 카 체이싱 추격 장면은 코믹 요소가 극대화된 요절복통 소동극이다.
▶손재곤 감독: “코미디에 대한 반응은 보통 대사에서 나온다. 설정 자체가 재미있다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지만 행동은 대본 단계에서 판단하기가 어렵다. 자칫 대본만 보자면 ‘이거 무리하는 것 아냐’고 할 수도 있다. 예전에 만든 코미디는 주로 한정된 공간에, 한정된 캐릭터의 관계가 펼치는 이야기이다. 친밀하거나 대립적인 남녀 관계에서 빗겨 나오는 코미디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작업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시트콤만 봐도 저 사람들이 더 잘하지 않나. 코미디빅리그를 보면 5분 내에 말로서 몇 번씩 웃긴다. 극장에서는 그 이상 확장해야한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코미디에 액션 요소가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액션 코미디면 범죄와의 전쟁도 있을 것이다. 이번엔 코미디 드라마 설정에 액션 요소를 생각했다. 그렇게 찍은 장면이고, 결과물이 안 좋으면 편집에서 줄이려고 했다.”
Q. 코미디 영화의 어려움
▶손재곤 감독: “예전에는 예측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 많이 웃는 것과 극장으로 오는 것은 별개인 것 같다. 소재에 대중적인 요소가 있어야한다. 근래 코미디 만들 때 신경 쓰는 것은 관객들이 뒤로 갈수록 더 크게, 더 웃는 것을 기대한다. 그걸 만족시키는 영화는 소수다. 그런 이류로 후반 이야기를 고민하고, 편집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코미디만으로 만족시키기는 어렵다고 본다.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내어 코미디와 함께 터져야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렇게 노력했다.”
Q. 요즘 한국영화는 극장 스코어와는 별개로 넷플릭스에 빵 터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K-Z코미디로 글로벌 히트가 될 것 같은지.
▶손재곤 감독: “OTT 덕분에 국제적 가능성은 생기니까. 외국 사람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이건 극장 개봉영화이다. 만드는 과정에서는 생각도 못한 경우이다. 아직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극장산업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많이 한다. 상영 시간이 100분이라고 해도 극장 오고가는 것을 따지면 반나절이다. 그런 시간 내어 극장을 찾아주시는 관객들이 재밌게 봐 주셨으면 한다.”
강동원, 엄태구, 박지현, 오정세, 신하균이 찬란한 K-POP 코미디의 진수를 선보이는 손재곤 감독의 <와일드 씽>은 지난 3일 개봉되어 어제까지 63만 여명의 관객이 들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